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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민의 잡놈 에세이] 청마 유치환과 아내 권재순의 평생 사랑

최강민(문학평론가) 

   

   청마 유치환은 생전에 남성적 의지를 드러낸 시를 많이 썼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센티멘탈, 그리움, 슬픔, 사랑이라는 여성적 취향의 시도 꾸준히 썼다. 유치환이 쓴 사랑의 시들은 실제 모델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모델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고, 이것은 훗날 청마 유치환의 삶에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유치환은 1939년에 첫 번째 시집인 『청마시초』를 발간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가 1935년에 발표한 「그리움」이라는 시이다. 따라서 이 시는 이영도 시인을 만나 애틋한 그리움의 감정을 받아 창작한 시가 아니다. 유치환은 이영도를 1946년에 처음 만났다. 인터넷에 보면 「그리움」이라는 시를 이영도와 연결시켜 이야기하고 있는 정보가 있는데 틀린 사실이다.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기빨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냐

                                                      ― 「그리움」, 1935년 12월 《시원》 5호 

   

  유치환은 생전에 사랑하는 여성이 여럿 있었다. 청마 유치환은 바람둥이(?)였던 셈이다. 10대 시절 낯을 가리고 내성적이었던 소년 유치환이 결혼 이후 여성 문제로 시끄러울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을 것이다.

 


유치환1.jpg
20대 시절의 유치환


 

   유치환이 사랑했던 여성은 먼저 부인인 권재순이다. 유치환은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가서 고향 소꿉친구인 권재순에 대한 연정에 눈을 떠 자주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 「소년의 날」에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유치환은 “햇발처럼 행복하고 / 달콤한 연정에 일찍 눈 떠 / 민들레 따서 가슴에 꽂고 / 꽃 같이 우울할 줄 배웠네라”라고 노래했다. 유치환은 사랑하는 권재순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학 공부도 함께 한 셈이다. 유치환이 연애 편지를 쓴 기원은 이영도가 아니라 장차 아내가 될 권재순에게 먼저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신교육을 받고 신여성이 되어 뭇 남성들의 사랑 공세를 받았던 권재순은 당시 유치환을 선택함으로써 통영의 젊은 남성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한다. 유치환과 권재순이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 보여준 사랑은 아름다운 낭만적 사랑이었다. 그렇지만 신혼 시절 이후 유치환의 외도(?)로 인해 이 둘의 사랑은 위기에 봉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권재순은 남편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포용의 마음으로 끝까지 유치환을 감싸안는 내조의 사랑을 보여주었다. 유치환의 문학적 성공과 명성은 부인 권재순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유치환이 부인 권재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해주는 시로 「병처」가 있다. 「병처」는 유치환이 1936년인 29세 때 발표한 시로 원제는 병처부(《신동아》, 1936.5.)이다. 유치환은 추상적인 관념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도 했지만, 시적 모델이 있는 대상의 시를 많이 썼다. 청마는 이 무렵 늑막염을 앓던 아내를 간호하면서 「병처」라는 시를 썼다고 한다. 문학을 하는 유치환은 경제적으로 집에 많은 도움을 주지 못했다. 부인 권재순이 남편 대신에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이러한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시 「병처」라는 시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감는 아내 ……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들고 또한 죽어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나니

 

가만히 눈감고 아내여

이 덧없는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의 거미줄을 관념하며

요료한 태허 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을 지키며

소조히 지저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야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 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짐승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 「병처」 전문

   

   아내에 대한 유치환의 사랑을 보여주는 시로 「안해 앓아」라는 시도 있다.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청마 유치환이 또 다른 여성에게 연정을 느껴 외도의 길을 보여준 것은 후대의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부일처제라는 윤리적 관습과 법률에 익숙한 탓인지 아내와 다른 여성을 함께 사랑하는 유치환의 모습은 범인으로는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유치환은 부인 이외에도 여러 여성과 사랑의 외도를 한 적이 있었다.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만주에서 병사한 장남 일향의 생모인 이란이 있었다. 장남 유일향은 1935년 부산에서 태어나 1940년 만주에서 병사하고 만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유치환이 부산 화신 연쇄점에서 근무할 때인 1934년에 이란이라는 여성을 만났을 것이다. 유치환은 1937년에 통영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또 다시 여자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유치환의 아우 유치상은 당시 일경에 붙들려가 고문을 당했고, 그 충격으로 시 쓰기를 그만두고 형 유치진이 있던 서울에 가 있다가 얼마 되지 않아 그 곳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동생의 사망은 유치환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고 보여진다. 여자 문제와 일제 예비 검속이라는 이유로 유치환은 1940년에 만주로 떠나 농장 관리를 하게 된다. 만주로 이주할 당시 유치환의 나이는 32세였다. 



   두 번의 여자 문제. 이 일로 청마 유치환도 마음고생이 심했겠지만 부인 권재순이 겪어야 했던 심적 고통은 상당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에 가부장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일부종사의 시대였기에 이혼까지 가는 극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유치환의 외도는 권재순에게 근심거리일 수밖에 없었다. 유치환이 해방이 되어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왔을 때 이영도 시인과 관련한 추문이 또 다시 번지는 상황은 권재순에게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 남편인 유치환에게는 여자 문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까? 아내 권재순은 자신과 남편인 유치환에게 묻고 또 묻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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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줄 아내 권재순, 청마 유치환


   유치환은 생명파 시인으로 허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남성적 어조의 시풍을 보였다. 이러한 남성적 세계는 여성의 사랑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무주의적 세계 앞에서 유치환의 대응 전략은 바로 사랑이었다. 유치환이 여러 여성들을 사랑하는 여성 편력을 보여준 것도 짧은 생에서 생에 대한 욕망을 사랑으로 표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마의 이와 같은 여성편력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생의 갈망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오세영) 시인 김종길은 「청마 유치환론」(1974)에서 유치환의 여성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청마의 여성 관계가 단순한 이른바 애정 행각이 아님은, 첫째 그 편지의 수량 자체가 증명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의 여성 관계는 그의 나이 사십 전후부터 비롯된 것인 듯하니, 그가 남달리 순진하고 자상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당대의 중년 한국인으로서 자기사 사랑하는 여성에게 그렇게도 많은 편지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청마는 마치 연애라는 것을 처음 해보는 사춘기의 소년처럼 열심히 사랑의 편지를 썼던 것이며, 비록 많이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그 편지들의 사연이나 말씨 또한 본질적으로는 그러한 소년들의 것과 매우 비슷한 성격의 것이었으리라 생각된다.

   

   후배 시인들은 가급적 청마 유치환의 사랑 편력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유치환은 플라토닉한 사랑을 즐겨하는 낭만적 시인이었고, 이것이 그의 시세계를 풍요롭게 했다는 입장인 것이다. 유치환이 여성에게 편지를 자주 보낸 것은 아내 권재순, 시인 이영도 외에도 반희정이라는 분도 있었다. 유치환은 반희정이라는 여인을 1958년에 문학 모임에서 만난 후 1963년까지 5년 동안 편지를 교환했다고 한다. 



   청마 유치환이 시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영도 시인과의 애틋한 사랑이 파생시킨 시적 긴장감과 몰입이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의 시적 긴장감이 이완되지 않은 것도 그의 플라토닉 불륜 사랑이 가져온 뜻밖의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남편 유치환을 여러 면에서 묵묵히 내조했던 아내 권재순이 없었다면, 우리들이 현재 기억하는 유치환의 시들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에게서 동생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의 역작들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 권재순은 청마 유치환에게 있어 자신의 예술을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런 점에서 유치환은 조강지처인 권재순을 만난 것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었고, 행운이었을 것이다. 이영도 시인과의 사랑이 세간에 주목을 받아서 아내 권재순과 청마 유치환의 사랑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치환과 이영도의 플라토닉 사랑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무엇보다 아내 권재순 여사의 통큰 마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치환은 1967년에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다. 그래서 유언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들은 유치환이 남긴 「행복」이라는 시에서 그의 유언을 발견한다. 이 시의 모델은 이영도 시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시에서 나는 교통 사고로 사망하는 순간, 아내 권재순에게 하고 싶었던 유언도 이 말이었을 것이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작성일 : 2017.11.22
저자 소개  

최강민
1966년생. 문학평론가, 문화평론가. 웹진 <문화 다> 편집인.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 평론집으로 『문학 제국』, 『비공감의 미학』『고독한 말』이 있다. munhwad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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