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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문화 다》 창간 4주년 기념 좌담 〈5〉] 문예지 문제 (최종회)

일시 : 2016년 9월말

참석자 : 김대현(문학평론가, 사회), 박일환(시인), 최진석(문학평론가), 김미정(문학평론가), 주원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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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60928_172353726.jpg김대현(사회) :  그 동안 한국 문학장의 최전선에서 작가를 발굴하고 공공의 의제와 담론을 형성하는 전초기지로서 문예지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극소수의 몇몇 문예지들을 제외한다면 대다수의 문예지는 그나마 얼마 되지 않던 독자들의 외면을 받으며 발행을 주관하는 출판사의 자산을 잠식하는 천덕꾸러기라는 것은 어느 정도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최근 이에 대한 대안으로 대형출판사와 유통망으로부터 독립한 문예지, 대중문화와 결합하는 문예지, 비평을 배제하는 문예지 등 새로운 형식의 문예지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기저한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김미정 : 가을 잡지는 아직 충분히 일별하지 못해서 말하기 좀 어려운데, 지난 봄, 여름 잡지들 보면서 문학비평이 많이 축소되었다는 느낌이랄까. 그냥 비평이 아니라 문학비평이요. 그리고 전체적으로 문학비평이 카산드라가 된 듯한 느낌 같은 게 있었고요. 제가 문학비평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거지만. 문학비평이란 뭘까, 문학비평의 미래는 뭘까. 이런 생각을 계속 하게 됩니다. 작가, 독자, 편집자 등등 모든 문학 주체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싶고, 그런 부분에는 전적으로 고무적이라고 여기는데. 한편으로는 아무래도 한국문학비평의 기능화된 역할 자체를 돌아보게 되고, 그리고 이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추측해보게 되고요. 다소 좁은 의미의 업계이야기를 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기존 한국문학비평 종사자에게 선택지는 어쩌면 아카데미즘 정도밖에 남지 않은 거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보게 됩니다. 결국, 지금 문예지의 변화는 문학 주체들의 강조점이 놓이는 자리가 달라지고 있는 것, 아니 문학 주체들의 자리의 재배치 뿐 아니라 문학한다는 개념의 재고 같은 상황인데, 그렇다면 문학비평을 전담해오던 기존 비평, 비평가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슨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해 이제 정말 심각하게 고민,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일환 : 기존의 문예지들이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하지만, 너무 무겁고 진지하고 딱딱하다는 지적들이 있어 왔지요. 그에 대한 대안으로 요즘 나온 잡지들이 젊은 취향에 맞춰 보폭을 가볍게 가져가고 있는데, 그런 잡지들의 경쾌함과 발랄함도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존의 문예지들과 새로운 문예지들이 서로 배척하는 관계가 아니라 공존을 해야 하고, 기존의 틀만 고집할 경우 시대에 뒤처지거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지 못할 수도 있죠.  


KakaoTalk_20160928_172354221.jpg   그런데 최근에 새로움을 표방하고 나온 『릿터』를 보니까, 문학을 읽어왔던 이들에게는 즐거운 읽을거리, 문학을 멀리 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즐길거리가 되고자 한다고 했어요. 핵심은 새로운 콘텐츠를 제공해서 독자들을 늘리겠다는 거죠. 그런데 과연 새로운 독자들이 누굴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식으로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젊은 취향, 아까 말한 대로 시집의 주 구매층이 젊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기도 하니까 그 취향에 맞추겠다는 거죠. 옛날의 창비나 문지 같은 경우 같은 동일한 문학적 지향점을 가진 에콜의 형태를 띠었다면, 요즘 나오는 잡지들은 그런 게 보이지 않아요. 있다면 그냥 뭉뚱그려서 젊은 취향, 가벼움 이런 것들이겠죠. 그런데 이게 정말로 새로움이라는 의미에 맞는 거냐? 진정한 새로움이란 건 낡은 것을 깨고 뭔가 혁명적인 틀과 전망 같은 것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데, 그런 고민을 제시해 주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악스트』 창간호가 나왔을 때 책을 만드는 사람들 소개에 ‘후장사실주의’라는 게 나오더라고요. 후장사실주의가 대체 뭐냐 싶어 궁금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그냥 반장난 식의 설명을 할 뿐이지 특정한 이념이나 개념 정의 같은 게 없더라는 말이죠. 그냥 정확히 규정할 수 있는 게 아냐, 따지려고 들지 마, 하는 게 그들의 취향이자 전략이라고 이해를 해야 한다 싶으면서도, 저로서는 난감하고 문학을 그냥 즐기는 차원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렇다고 나온 걸 부정할 수는 없는데, 대신에 그와는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흐름이 나와 줘야 상호보완이나 보충이 될 거라고 봐요.  


   새삼 아쉬운 게 문학의 개념을 너무 좁게 설정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소위 말하는 정통문학이 아닌 르포를 쓴 스베틀라냐가 받았는데, 그런 측면에서 르포 전문 잡지 하나 없는 우리 현실이 무척 안타깝죠. 르포 잡지도 나오고 그렇게 다양해지면서 문학판이 넓어지는 게 진짜 새로움에 다가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릿터」나 『악스트』 같은 잡지들이 진정한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akaoTalk_20160928_172355718.jpg주원규 : 문예지의 쇠퇴에 대해서 비평을 항상 문제시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비평의 소멸은 문학 생태계가 건강한 발전이나 진보로 발전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평을 너무 간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에 주례사 비평이다 해서 비평을 비판하는 경우가 만연해 있지만 그렇다 해서 비평읽기의 즐거움이나 유익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소설 작품을 탄생시키는 텍스트, 곧 2차 콘텐츠는 비평이라고 생각하구요. 문예지의 존재가치는 건강한 비평과 새로운 독서읽기의 즐거움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문예지가 갖고 있는 일종의 문화유산과도 같은 전통성을 자본의 논리에 의해 스스로 와해시키는 현상의 이면에는 책을 어렵게 읽지 않으려는, 책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읽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미정 : 가볍고 경쾌하다라는 느낌은 확실히 지금 한국사회의 세대론 담론과 무관치 않을 것 같은데요. 앞서 이야기 나누었듯, 지금의 세대론이란 게 단순히 젊음을 내세운 인정투쟁만은 아니죠. 저는 지금 얘기 나오는 젊음, 새로움 같은 모토가 일정 정도 ‘세대’ ‘세대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라면, 더더욱 단순히 생물학적 젊음이나 역사 속 담론효과로서의 젊음을 환기시키는 효과를 넘어섰으면 합니다. 젊음, 새로움 같은 말이, 특권화된 그 젊음과 새로움이 아니라, 현 세계의 불안정한 우리 모두의 존재 조건을 함축한 장소라는 면을 강하게 환기시켰으면 좋겠어요. 지금 세계의 총체적 모순을 경험하고 있고 또 사유할 장소로서의 어떤 표상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할 때, 그게 프롤레타리아든 프레카리아트든 일정 정도 거대담론의 흔적을 가진 말로 환원되는 것에 우리는 학습된 거부감을 가질 때가 많잖아요. 그럴 때 세대라는 말이 역으로 유용할 때가 많은 건데. 어쨌든 그렇기에 이 젊고 새로운 분위기라는 것이, 젠더건 계급이건 지역이건 현재 세계의 모든 불합리, 부조리를 함축한 장소로서의 세대, 세대론과 연결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KakaoTalk_20160928_172523486.jpg   이런 생각을 할 때 지금 창간호, 혁신호들이 독자중심으로 이행한 경향에 이런 상황이 좀더 부각되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의식이 담보되지 않는 독자, 대중이란 그저 시장구속력에 강하게 붙들어 매인 존재의 이미지 이외의 것이 잘 떠오르지 않아서인데요. 그렇기 때문에라도 지금 잡지들이 상정하는 독자=대중이 좀더 사회학적, 사회과학적 상상력과 더불어 벼려진 문제의식을 반영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갖게 됩니다.


최진석 :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기 때문에 꼭 반드시 전통적인 종이매체가 아니더라도 글을 쓰고 자기를 표현하는 공간이 많이 있잖아요. 문학을 통해서 대중이 문학과 접하고 스스로를 문학인으로 귀속하는 방식들은 다양할수록 좋지 않나 싶습니다. 작년이었나요, 국가에서 문학잡지 등에 대한 보조비를 줄인다 없앤다 했을 때, 제가 이런 생각을 어느 모임에서 피력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거기 모인 분들이 그러더군요. 문학잡지들 중에서도 별로 존재감이 없는 것들이 꽤 있다고. 그 잡지들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별 의미 없이 생산되는 것들도 있다고요. 그 분들 의견을 존중하기 때문에, 그게 틀린 판단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KakaoTalk_20160928_172407558.jpg   하지만, 저는 말하는 권리, 글로 쓰는 권리, 어떤 식으로든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으로서 문학은 그런 ‘자격’의 논리를 떠날 필요가 있다고 믿어요. 자격을 문제 삼을 때 필연코 부딪히는 문제는 어떤 게 ‘진짜’ 문학이고 ‘가짜’ 문학이냐는 이분법이잖아요. 검열의 기제이자 치안의 논리인 거죠. 자정(自淨)이라는 좋은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것을 판가름하는 문제는 결국 힘싸움이 되기 쉽고, 기성의 권력을 누가 더 많이 분점하느냐의 권력투쟁이 되기도 쉬워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문학생태계를 더 확장하고 다양성을 담보하는 방법의 하나는, 이질적인 것들, 우열의 가치를 말할 수 있어도 어쩔 수 없이 서로 공존하는 그런 장을 마련하는 데 있다고 봐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잡지들이란 건, 물론 정말로 그런 것도 있겠으나, 어떤 면에서는 기성의 문학장의 구도 내에서 하위화된 것들일 수도 있는 거니까요.


   아무튼 문학장에서 등단을 통해 공인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아직 그렇지 못한 사람들, 혹은 그런 방식의 승인에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사람들조차도 하나의 문학공화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거에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발언의 창구로서 문학잡지들이 더 많이 생산되고 더 많이 유포될 필요가 있죠. 막말로 ‘종이쓰레기’가 되어도 좋다고 봐요. 우리가 종이낭비를 걱정하면서 잡지를 만들 건 아니니까요(쓰레기야 재활용하면 되지요!). 또 어느 시대는 쓰레기 취급을 받아도, 다른 시대에는 진귀한 보배가 되고, 혹은 읽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의 단련의 거쳐야 하는 것들도 있으니까 말이죠. 요사이 등장한 독립문예지들, 혹은 문단사람이 아니라 문학애호가들이 내는 잡지들, 모두 다 더 많이 나오고 더 자주 볼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김대현 : 비유하신대로 문학이라는 하나의 생태계가 있다면 분명히 비평이 자리하는 자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태계에서 비평이 자연 도태되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상업적이나 또는 누군가의 취향에 영합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배제된다면 생태계 자체가 엉망이 될 수 있다는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정말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들은 뒷자리에서 더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좌담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끝)




 

작성일 : 2016.11.11
저자 소개  

박일환, 김대현, 최진석, 김미정, 주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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