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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시내의 영화 읽기] 불안한 시간과 공간

-김광복 감독의 <사월의 끝>(2017)

 

손시내(영화평론가)

 

   허물어져가는 낡은 아파트는 한국 영화에서 드물지 않게 등장하는 공간이다. 박정희 정권의 표상인 개발주의의 흔적이며 한국식 근대화의 잔여인 곧 재개발될 아파트는 특히나 2000년대 이후 등장했던 공포영화의 배경이자 주인공으로 자리매김했다. <소름>(2001)에서부터 <숨바꼭질>(2013)에 이르기까지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이러한 아파트는 소위 ‘귀신 들린 집’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과도 차별화되는 한국식 공포영화의 고유한 공간이라 부를 만하다. 한때는 근대화와 부의 상징이었으나 이제는 몰락과 가난한 풍경의 상징이 된 오래된 아파트의 물질성과 음산하고 위험한 분위기가 한국 사회를 휘감는 모종의 공포와 공명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공간에 이끌릴 때, 단지 공간의 이미지 그것도 한때 많은 이들의 터전이었음이 분명한 공간의 이미지만을 소비하게 될 위험을 영화는 언제나 안고 있다. 제 21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에서 공개되었으며 지난 달 개봉한 김광복 감독의 <사월의 끝>은 오래된 아파트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 공간을 보다 섬세하고 입체적으로 다루고자 노력하는 공포/스릴러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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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는 재개발을 앞둔 지방의 낡은 아파트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주인공 현진(박지수)이 이사 오면서 시작된다. 이사 온 첫날부터 현진의 주위에서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옆집 가족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밤새 벽에서 돼지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리는가 하면 죽음의 광경을 반복적으로 목격하기도 한다. 그러는 한편 현진은 옆집 고등학생 주희(이빛나)와 각자의 힘듦과 답답함을 짊어지고 점차 가까워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현진에게 주희는 여전히 조금은 낯설고 의심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여기에 주민 센터에 새로 부임해온 복지담당 박주무관(장소연)의 모습이 차츰 등장하면서 영화는 전체적인 구조를 갖춰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이야기가 정리되는 방향이라기보다 영화에 정돈되지 않는 구멍을 뚫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의 관계를 펼쳐놓는 쪽에 가깝다. 이를테면 영화 내에서 뚜렷하게 현진과의 접점이 제시되지 않는 박주무관이 사회복지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현진의 미래처럼 보인다거나, 주희의 현재 모습이 지긋지긋한 가족을 피해 혼자만의 공간을 마련한 현진의 과거처럼 보이는 점이 그렇다.

 

   물론 이런 수수께끼들은 영화의 최후반부에 이르러 세 사람의 관계가 드러나는 반전이 등장하면서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사월의 끝>에서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이 내내 제시되었던 조각들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서로를 붙들고 있으며 매끈한 서사의 외피에 안정적으로 달라붙는지의 여부는 아닌 것 같다. 차라리 좀 더 인상적인 지점들은 이런 것들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가 내뿜는 음산한 기운들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동시에 이 공간은 공포의 공간뿐이 아닌 그리움과 같은 정서적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진이 고단한 일상 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드문 순간은 그녀가 학원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함께 할 때이다. 현진의 집 거실에서 그에게 현진은 허름하고 낡은 집의 모습에 놀라고 실망하지 않았는지를 걱정하면서도 혼자 살고 있는 이 공간을 좋아한다는 말을 한다. 오래된 집의 모습 때문인지 현진에게 이 공간은 마치 오랜 그리움 끝에 돌아온 혼자만의 집과 같아 보인다. 재개발 대상이 된 오래된 아파트들은 많은 이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인 동시에 물리적으로 매우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들이 현진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아파트는 공포와 그리움, 휴식과 위험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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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영화의 중요한 반전, 그러니까 우리가 내내 보아왔던 현진이 사실은 20대가 된 주희의 모습이었으며(현진은 박주무관의 이름이다) 그간 그녀가 겪었던 많은 일들이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주희의 환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좀 더 생각할만한 지점이 된다. 영화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세 인물인 현진, 주희 그리고 박주무관은 마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아파트를 중심으로 느슨하게 서로를 맴도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저마다 아파트에서 떠나지 못했거나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다. 현진(박지수)에게 집이 주는 복합적인 정서를 이러한 맥락에서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녀는 일련의 공포스러운 사건들을 겪으면서도 지금의 낡고 허름한 아파트를 떠나고 싶다거나, 여기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욕망을 갖지 않는다. 이는 내일 아침에 이 아파트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주희(이빛나)의 태도와 대비되지만 두 인물이 사실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떠나고 싶었으나 결국은 다시 돌아온 곳,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곳, 살아야 하지만 삶의 터전은 될 수 없는 곳이 바로 이들의 아파트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슈퍼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현진과 주희의 관계에 크게 균열이 일고 아파트는 점차 삶이 아닌 죽음에 가까운 공간이 된다. 이 죽음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주희-현진(박지수)의 환영인지는 모호하지만 대신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죽음들을 경유해 영화는 어떤 결말로 나아가는가, 그러니까 이 죽음들로 인해 영화의 세계에는 무엇이 남겨지는가. 영화에서는 결국 현진(박지수)을 제외한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 현진 자신의 과거와(주희의 자살) 도달하지 못한 미래(박주무관의 살해)가 각각 죽은 것이다. 혹은 집을 떠나고 싶어 했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집을 떠난 이들의 죽음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남겨진 것은 현진의 되돌아가거나 나아갈 데 없이 고여 있는 시간뿐인 것이다. ‘아버지의 정리해고’나 ‘공무원 시험’등으로 제시되는 주희-현진이 처한 상황, 되풀이되는 비극과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녀의 시간과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공간의 불안한 현재만이 영화의 마지막을 가득 채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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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폐쇄성, 그로인한 외로움은 사실 처음부터 세 인물의 삶과 관계에 은밀하게 달라붙어 있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맴돌지만 좀처럼 만나지 못하거나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없고 무엇보다 서로를 결코 지킬 수 없다. 이들의 관계 사이에는 연대도 적대도 들어서지 않는다. 서로를 신경 쓰고 걱정하지만 함께할 공간을 지킨다거나 서로의 삶을 지키는 일은 이들의 세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사회역사적 유산이라 불릴만한 비극과 불행을 물려받았지만 그것을 나눌 여유조차 갖지 못한 존재들이다. 영화의 초중반, 현진과 주희에게 공포와 위협으로 등장하는 타자들의 모습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나 장애남성의 통념적인 재현에 그치는 문제도 마치 이러한 폐쇄성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월의 끝>은 여기에 섣불리 희망과 연대를 제시하지도 그렇다고 냉정하게 이 세계를 끝내버리지도 않은 채 주희-현진의 외롭고 불안한 현재를 끝까지 응시한다. 영화가 응시하는 그녀의 모습은 허물어지기 직전의, 그러나 아직 허물어지지는 않은 낡고 불안한 아파트를 닮아있다. 영화의 바깥에서 현진의 4월은 곧 끝나며 아파트도 허물어질 것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 되기 전에 멈추어 서서 우리에게 한국 사회에 흐르는 시간의 한 단면을 그와 같은 특성을 지닌 공간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작성일 : 2017.10.13
저자 소개  

손시내
영화평론가.
2016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sinea04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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