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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의 시지푸 숨결]  평론아, 어딨니? 내 목소리 들리니?

김정남(소설가, 문학평론가)

 

  

  논문평론, 교수비평가

 

   드라마응답하라 1988의 명대사, “덕선아, 어딨니? 내 목소리 들리니?”를 떠올린다. 아침 등굣길 만원 버스 안에서 안경에 김이 서린 도룡룡(이동휘 분)이 덕선이(이혜리 분)가 보이지 않자 그녀를 애타게(?) 부르던 그 대사다. 종로에서 김 시인! 하고 외치면 적어도 서 너 명은 뒤를 돌아본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우리 문단도 초만원 상태이고, 그 중에서 제대로 된 비평가와 평론을 찾기란 사실상 가물에 콩 나는 일이어서, 나 역시도 이렇게 불러본 것이다. 평론아, 어딨니? 내 목소리 들리니? 글쎄, 고매하신 분들이 내 목소리를 듣고 화답이나 할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내가 비평과 창작 활동의 과정에 느낀 앙금들 몇 가지 얘기할 터이니, 듣든지 말든지 그것은 당신들 소관 사항!

 

   언제나 문제는 스스로 지성임을 자부하는 족속들에게 있다. 현재 한국문단에서 비평가는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레디메이드 인생들이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소논문과 학위논문을 통해 숙달된 분석의 기술에, 약간의 감각과 문체의 멋을 더하면, 어느덧 평론가라는 이름으로 문단 말석에 엉덩이를 붙일 준비가 되는 것이 아니던가. 세계에 대한 해석의 욕망과 불온한 사유의 의지가 글쓰기의 동력이 되기보다는, 설익은 이론과 현학적 용어로 무장한 범생이의 글이, 갓 전학 온 부잣집 아들내미처럼 얼굴을 내밀게 되는 것이다.

 

    논문은 오로지 머리로만 쓸 수 있고, 또 그렇게 써야만 논리의 정치함을 기할 수 있지만, 적어도 평론이라는 글은 가슴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고, 또 그렇게 써야만 비평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 법의 목적이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법 자체를 보호하기 위해 군림하는 것과 같이, 비평 행위를 통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의 논리만을 위해 복무할 때, 그것은 이미 죽은 글이 된다.

 

   논문은 이미 대학 사회의 취직과 생계의 방편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교수가 되려는 자에게는 취직을 위해, 교수가 된 자에게는 신분 유지와 인센티브를 위해 필요한 정량적 평가의 기준일 뿐이다. 이러한 연구 시스템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유지되고, 대학과 연구기관들은 이 체제 안에서 서로 경쟁하며, 연구자들은 그 하부에서 끊임없이 논문이라는 물량을 공급하여 개체의 생존을 유지한다. 감시와 처벌이라는 억압의 구조는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내면화한다는 것은 국가 단위의 지식 산출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종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계량적 평가 속에서 메뉴팩처링화되어 버린 논문 공장에서 우리는 어떠한 학문적 진보와 지적 모험을 꿈꿀 수 있겠는가.

 

    그러면 평론은 무엇인가? 이 시스템 안에 포섭되거나 평가되지 않는 영역이다. 쉽게 말하자면 평론은 취직에도 도움이 안 되고, 밥통을 지키는 데도 필요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사회에서 평론은 잡글로 인식되기 십상이며, 취직에 성공한 자에게는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는 사이드 워크로 전락하고 만다. 평론가의 단명이나 조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등단과 함께 청탁에 의해 작품론이나 작가론 혹은 계간평으로 이런저런 지면에 얼굴을 내비치다가, 결국 연구실에 들어가 앉게 되면 잘리지 않을 만큼의 논문만 찍어내며 정년으로 가는 무사안일 속에 자신을 놓아버린다.

 

   한국 문학계에서 비평이라는 장르가 다시 부흥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논문의 아류로 취급되거나 대학에서 밥 먹고 사는 이들의 전유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비평계=학계의 도식이 쉽게 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문학평론은 아카데미의 지배권 안에 기생할 수밖에 없고, 비평계의 자기 혁신과 지적 모험 역시 요원한 일이다. 문학이 죽었다는 말은, 곧 문학의 아카데미화와 동의어이며, 대학의 교강사들에 의해서 불법 복사물로 배포되는 시나 소설 속에 들어 있다. A4 복사 용지 속에 갇혀버린 문학이라니, 자학을 동반한 실소가 아니 나올 수 없다.

 

 

인용이냐, ‘아첨이냐

 

    학계와 평단과 문단이 모두가 한 통속이기 때문에 이들 사이의 역학 관계는 어떠한 건강한 긴장도 확보될 수 없는, 사사로운 공생관계에 의해 유지된다. 주례사라고 하는 삿()된 비평적 관습은 유구하게 우리 문학을 좀 먹어 왔다. 이를 통해 함량미달의 작품이 과대평가되기도 했고, 쇄말적 미적 형식이 침소봉대되기도 했다.

 

   최근 한 여성작가의 표절 문제가 새삼스럽게 불거진 것을 보면, 우리 문단이 얼마나 썩은 물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 문제는 이미 16년 전, 한 평론가에 의해서 제기된 문제이지만, 이처럼 오랫동안 침묵의 카르텔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문단권력 모두가 스타시스템으로 담합의 구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기집권했던 편집위원들이 사퇴하고 사장이 물러나고, 문인들이 모여 긴급 좌담을 개최하는 일련의 모든 짓이 한마디로 쇼에 불과했다는 것은, 그들의 근본적인 권력구조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현재의 상황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대체로 평론은 청탁에 의해서 씌어진다. 시나 소설의 경우는 창작의 계기가 반드시 청탁에 의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창작의 촉발점이 생기면 능동적으로 쓰기 마련이며, 그렇게 미리 준비된 작품이 청탁에 의해 지면에 발표된다. 주로 평단에 갓 진입한 신인들은 시집이나 소설책에 대한 리뷰를 맡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비평의 대상이 되는 작품까지 미리 정해져 청탁이 된다. 작품들은 대부분 문예지를 발간하는 출판사나 서로가 언급해 주어야 할 상황에 놓여있는 출판사에서 나온 단행본들이다. 이들의 리뷰는 작가에게는 출간된 작품의 주목 여부에 대한 바로미터가 되며, 출판사에는 문단의 관심을 유도하고 상업적 계기점을 만들기 위한 난()으로 기능한다. 결국 서평란을 통해 평론가는 출판사의 치어리더가 되는 것에 자발적으로 동조하며, 미사여구를 동원한 그들의 비평적 언사는 관중의 호응을 유도하는 과장된 몸짓으로 전락한다.

 

   계간평이나 격월평으로 주어지는 지면의 경우는 작품 선택이 평자의 감식안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그 취택 방식의 공정성에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여러 지면에 발표된 작품을 두루 읽어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지만, 그들은 그런 성실성보다는 메이저 지면에 수록된 작품을 일차적인 독서의 대상으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문예지는 그들의 집으로 우송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렇게 평론가들에게 무가지로 공급되는 문예지는, 속된 말로 일 년만 지나도 한 트럭이다. 이렇게 평가의 대상이 되는 지면도 한정적이고, 거기에 수록된 작품들의 주인들도 기실 그 나물에 그 밥인 상황에서, 작품의 생산과 비평은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고인 물이 어떻게 깨끗할 수가 있으며 또 깨끗하기를 바라겠는가.

 

   인용의 형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핥고 빨아주는형국 또한 목불인견이다. “○○○ 평론가가 라고 말했다.”는 언급에서 중요한 것은 에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라 (주목 받고 있는 평론가의) ○○○라는 이름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윤리학을 말하기 위해서 스피노자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범박한 개념의 윤리를 말하기 위해서 동료의 이름을 인용하는 것은, 그의 당대적 이름값을 공유하는 아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흡사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특정인과의 사적인 친분을 과장하는 것과 같은 속물근성이 비평의 인용 방식에도 스며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것은 과거 미래파 논쟁과 같은 이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는데 그들은 서로를 밀고 당기며, 작은 말풍선들을 모아 휘황한 담론의 오색 애드벌룬을 높이 띄워 올렸더랬다.

 

     

사유화(私有化) 되는 공적 기구들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지만, 갈수록 한심해져 가는 문학판의 현실에 침묵할 수만은 없어 이렇게 지절거리고 있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날뛰는 이들이 있어, 문단 전체가 사교 클럽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한번은 한 시인에게 청탁 건으로 전화를 한 일이 있었다. “이제 시집 내실 때 되지 않았어요?” 내가 예의상 이렇게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그렇지 않아도 ○○()에게 원고 넘겼어.” 누구나 그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면 다들 그렇게 얘기를 하곤 했는데, 이디엄와 같은 이런 말을 다시 들어야 하는 상황에 나는 잠시 환멸을 느꼈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이를 지금 나의 상황으로 돌려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이 원고를 탈고한 후 송고를 한다고 했을 때, 그 수신처는 편집자나 발행인이 아니라 월간 시와표현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왜 많은 이들은 그 출판사에 원고를 보낼 때는 언제나 그 편집자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 사람에게 원고를 보냈다고 할까. 게다가 그가 내 시(소설) 참 좋다고 하더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득의에 찬 미소를 내비치는가. 그 출판사가, 그 편집자가 당신들 문학의 최종심급이라도 되는가. 아니면 그 출판사가 그 편집자와 동의어인가? 나는 특정 출판사와 특정 개인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들은 이미 유능하며 풍부한 인문적 자양분과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는 어소리티다. 나는 단지, 공적 기구를 사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여 문학판을 유치한 친교의 장으로 전락시키는 문인들의 무지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나이 들어 대소변을 못 가리면 우리는 그것을 치매라고 부른다. 공과 사는 구분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었을 때 소위 정의라는 것이 개입될 여지가 조금이라도 넓어진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는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치매환자로 넘쳐나는 문학판에 무엇보다 절실한 경구다. 사적으로야 밤새워 술을 마시든, 눈이 맞아 간통을 하든, 웨딩마치를 울리든 내가 알 바 아니다.

 

   문인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SNS를 보라. 물론 사적인 것이긴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누나, 오빠, 동생으로 호칭하며 각자가 나누어 가진 지분들 속에서 서로를 인용하며 칭송하는 관계가 과연 건강한 것인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성명서를 쓰고, 리본을 달고, 촛불을 들기 전에 자신이 발 담그고 있는 문단의 권력구조와 공공연한 모순을 눈감아 버리는 작태를 먼저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당신들이 저 추악한 정치권의 야비한 욕망과 권모술수들을 손가락질 할 자격이 있는가.

  

   유치한 인간들은 사방에 널려 있다. 내가 어디선가 언급했던 말이지만, 이 자리에 다시 불러와야겠다. 한 시인은 자신의 시에 대해 입만 열었다 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가 ○○○○에서 시집 냈을 때 말이야…….”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집일까, 아니면 출판사의 이름일까. 브랜드로 자신의 허명에 가치를 더하려는 그의 무의식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자신의 문학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기서 책을 낸 사람이라는 사실을 뻐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도 여러 비주류 앞에서 말이다. 그런 의식을 가진 인간은 문학판이 아니라 여의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안 팔리는 책 한 권, 메이저 출판사에서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명예이기는 했겠다만.

 

    그 나물에 그 밥인 문단이지만, 나는 그 기반이 좀 더 공적인 맥락 위에 서 있길 바란다. 알음알음으로 청탁하고, 책 내고, 서평하고, 4 붙이고, 출판기념회하고, 세미나하고, 낭독회하고, 끼리끼리 술 마시고, 키득거리고, 서로 어깨 토닥이는 이런 공모의 관계를 조금 덜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직한 독고다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그 희귀종은 나이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 문단에서 이미 멸종한 듯싶다.

 

      

니들이 비평의 맛을 알아?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고, 게 맛도 본 사람이 잘 안다. 비평도 해 본 사람이 잘 알겠지만, 청탁에 의해 이런 저런 지면에 동원되다 보면, 내가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런 말을 자랑스럽게 떠벌인 사람을 알고 있다. “난 문단 떠났어. 이제 비평 같은 잡문은 안 써.” 이미 오래전 연구실에 들어앉은 그는 논문과 각종 연구 프로젝트에 몰두하며 상아탑의 권위를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도 이 사람은 문단에 잠시 발을 담그고 있었을 뿐, 비평의 참 맛을 알지도 못하고 떠난 얼치기가 분명하고, 그 사실을 소리 높여 자랑하는 얼간이일 뿐이다.

  

   적어도 비평은 현장성에 기반한 예민한 감각과 날카로운 직관의 산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논문처럼 다 지난 얘기를, 하나마나한 얘기를 늘어놓는 일과 구분된다. 일 년에 수 천 편의 경제학 논문이 쏟아져도, 어느 하나 한국 경제의 위기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추상적 지표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상적 이코노믹맨이 산출해 내는 숫자들만이 존재하며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등 비경제적 조건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주로 설문이나 데이터 위주의 결과를 분석하는 논문들이 가지는 이러한 공허함은, 조금 과장하자면 논리를 위한 논리만을 양산하는, 소위 학술 행위라는 것의 무가치성을 반영한다.

 

   글 쓰고 책 내는 일들이 모두 나무를 베서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잘못된 글은, 불필요한 글은 환경파괴를 앞당기는 인류적 해악이다. 적어도 한국 땅에서 문학을 빙자한 글들은 반 이상 사라져야 옳고, 문학한다는 사람들도 반 이상 손을 놔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한국의 대학은 절반 이상 망해야 옳고, 거기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도 반 이상 옷을 벗어야 한다. 비평계든 학계든 알맹이가 없다. 그러니 모든 껍데기는 사라져야 옳지만, 그것이 각자의 명분이고 밥벌이니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건강한 비평 정신을 구현할 자신이 없으면, 연구실에 들어앉아 등재지에 투고할 논문 매만지며 잘리지 않을 만큼의 연구실적이나 세이브하는 편이 낫다.

 

   세상은 요지경, 요지경 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 그렇다는 얘기다. 아니면 말고. 그럼, 이 특집 원고의 테마인 쓰고 싶은 평론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뭘 쓰고 싶으냐고? 어떤 글을 쓰고 싶으냐고? 글쎄, 지금까지 내가 비판한 이런 짓거리 안하고 묵묵히 구도의 길을 가다보면, 내겐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만은 분명하다. 당신들끼리 책도 내시고, 훈훈한 덕담도 나누시고, 순서대로 상()도 나눠 타시고, 인디밴드 불러다 놓고 북콘서트도 하시고, 여하튼 내내 행복하소서. 그나저나 평론아, 어딨니? 내 목소리 들리니?

 

 

 

* <시외표현> 2016년 9월호 "쓰고 싶은 평론"코너에 발표되었던 글 재수록함.

 

작성일 : 2016.09.07
저자 소개  

김정남
소설가, 문학평론가.
2002년 『현대문학』에 평론이, 200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각각 당선되어 등단. 펴낸 책으로 문학평론집 『폐허, 이후』·『꿈꾸는 토르소』·『그대라는 이름』, 소설집 『숨결』(제1회 김용익 소설문학상 수상작)·『잘 가라, 미소』(2012년 4분기 우수문학도서), 장편소설 『여행의 기술―Hommage to Route7』(2014년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등. phdj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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