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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의 성역과 바벨] A와 정치 Ⅱ

주원규(소설가, 철학박사)



빛과 부유


   빛이 스며든다. 이때, 명명하는 빛의 기의記意는 통념적으로 통용되는 기표記標를 언제나, 늘 전혀 동일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며드는 유예의 방식으로 떠돈다. 이때의 빛은 현상계이든 상징계이든 상관없이 불확정성으로서 여일如一한 ‘어떤 것’이다. 그 어떤 것으로서의 빛은 때론 먼지처럼, 때론 명쾌하지 않은 은밀한 비밀처럼 떠도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는 이 순간들, 반복하는 어떤 것들은 확정되거나 언명되어 활동하기 이전이거나 그 사이에서 부유浮遊하는 주체들이다. 이를 주체라 함은 어찌된 일인가. 

 

   보통 주체라 함은 수많은 객체들 중에서 용인되거나 허락된, 그도 아님 다 걷어치우라 말하고서 당당하게 나서는 돌연변이에 가깝다. 그게 주체로 명명되는 보편의 화법이리라. 그런데, 스며든 빛의 사이에 보이는 주체는 부유하는 상태로서의 주체다. 이 주체는 객체라는 상호 조응의 장에서 논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거나 ‘그 어떤 것’이다. 이 경우 국소적으로 언명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은 사이와 사이에서 부유하는 후행後行 기질로 가득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때 명명되는 주체는 그 어떤 기반, 혹은 전제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이른바 전무후무한 것이며, 더 나아가 이 주체는 없지도, 있지도 않는 그 어떤 것으로 상관하는 관계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렇기에 빛의 스밈은 누구나 다 아는, 하지만 별 무관심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 비밀은 네오포스트모던을 살아내는 모든 존재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심각하게 비루해 보이면서도 그럼에도 완전히 끈을 놓을 순 없는 불편 황홀한 상호 밀약으로 부유한다. 필자는 이 부유하는 비밀의 공개가 주체임을 분명히 밝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른 비밀, 밀약의 뒤란에 존재하고 있던 부유하는 주체들과의 대화에 참여하고자 한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질문. 이 대화의 청자와 화자는 누구인가. 또한 이 대화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도날드noname01.png

● 미니멀리스트 도널드 주드의 무제란 작품이다. 작품이라 부르기도 인색한 미니멀한 재료의 배치 속에서 한 가지 분명해지는 건 사물의 의미 不在와 그 틈새에 있다.  

 


중얼거림과 울음


   대화란 것을 생각할 때, 중얼거림, 혹은 울음을 배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얼거림은 일단 독백이라고 생각하거나 최소한의 의미활동과 상관없는 기표세계의 표류로 인지하는 경우 가 다반사다. 그렇다면 울음은? 울음은 아예 대화의 축에 끼워주지도 않는다. 


   대화는 말이 통하는 코드의 기술에 의한 것이며, 그 기술적 바탕 위에서 감정을 교류하는 과정 속에서 웃거나 울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하는 희로애락을 펼쳐 보이는 걸 일련의 순서로 이해한다. 여기서 생뚱맞게 울음을 대화의 전제로 꺼낸다는 것 자체를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밝힌 빛의 스밈을 한 번 주제로 설정해보자. 또한 그렇게 스며드는 빛의 사이에서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틈새적 주체들을 한 번 들여다보자. 이 틈새적 주체들은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체계의 망을 망실해 버린 주체 아닌 주체들, 없는 것 같으나 있는 탈주체脫主體의 주체主體들이다. 


    탈주체의 주체들은 끊임없이 떠돈다. 끊임없이 흐르거나 비껴 오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순식간에 미끄러져 내리며 하강하거나 상승하는 경악의 롤러코스터를 반복하기도 한다. 
 

   끝도 보이지 않는 하강과 상승의 공회전을 되풀이한다고 가정해보자. 뭐든 중얼거리지 않겠는가. 울지 않겠는가. 부유하는 주체로 존재가 지속된다는 가정은 ‘그 어떤 것’이 세상의 배후에서 세상의 전부와 불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가장 선명한 전위적 지점을 가리킨다. 이 전위로서의 가정, 그 만약은 세속성이란 체계가 촘촘히 마련해 놓은 그물망의 틈새를 어떻게든 뚫거나 비켜 선 애매한 속으로 존재를 이끌어낸다. 그렇기에 그 전위에선 할 말, 곧 대화라는 게 중얼거림이거나 울음, 두 경우 외엔 없는 것이다. 


  중얼거림은 화자와 청자가 따로 없다. 체계에서의 부분인 화자가 중얼거림만으로 ‘그 어떤 것’의 말을 꺼내는 순간 그 ‘말’은 기표든 기의든 순식간에 헝클어지는 야생의 백치가 되어 뒤섞인다. 그 뒤섞임이 대화의 통념과 주체와 비주체 사이의 관계를 역산하게 하는 세상 안팎의 전위에 자리하게 한다. 이 경우 관계가 부유하는 주체 사이에서 희미하거나 선명하게 명멸하는 빛의 출현과 소멸 사이에 ‘그 어떤 것’으로 주고받는 불규칙한 화학작용이라 본다면 이 때의 관계 사이에서의 타자는 일종의 거대하고 산만한 부유하는 주체군을 형성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단언컨대 부유하는 주체군은 이렇듯 휘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운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울 수밖에 없다. 어떤 긴장이나 검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기망실의 주체읽기를 무용한 것으로 취급하는 전위의 포지션에 적응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친다. 중얼거림과 울음만으로 말이다.    



그리고 정치


 전위의 자리매김에 있어서는 불규칙한 화학작용이 마치 물 위에 떠오른 주체들처럼 모호한 위치들을 점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부터 글쓰기는 비로소 독자인 여러분에게 텍스트과 같은 것이, 텍스트가 아닌 것인 새롭거나 놀랍지 않거나 하는 방식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한다. 어쩌면 그것은 ‘트집 잡기’ 같은 예상 가능한 어떤 길, 혹은 방향과도 거리가 먼 낯선 표류의 어느 지점들로부터 거의 조직적일 만큼 집요하게 탈주하는 탈주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글쓰기 같은 것일지도 모르는데, 바로 A에 대한 것이다.


   A는 일상과 비일상을 상대적으로 구분 짓는 기준으로 일종의 보편적 모럴moral을 제시해 왔다. 그것은 강고한 율법처럼 인간, 공동체,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란 체계를 견고한 하나의 끈으로 취급하기에 익숙했다. 그러한 모럴이 가져오는 파급효과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신의 마비, 중얼거림으로서의 대화의 마비, 틈을 허용치 않는 균열 없음의 완벽성 추구란 자기기만적 허위만을 강화했다. 모든 언어, 의미, 사상, 신념, 관계의 그물망이길 자임하는, 기축의 틀거리로서 스스로를 모든 것의 통용가능성이 편만한 제단 위의 제물로 올려놓은 A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중얼거림, 울음의 가능태가 가장 집요한 상황을 출현시키기 직전에 무위의 제단 위에서 화형시켜 버리는 오만한 정화의식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정화의식은 일상을 비일상과의 상대적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해놓고 그렇게 상대적 우위를  점거한 일상의 순간과 그 순간들의 지속을 인간다움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A는 모럴의 깊이에 도달하지 못하는 모든 불명료함을 결코 중얼거림이나 울음으로 환원하지 않는 그 나름의 엄격성으로 무장한 채, 비일상의 진창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 진창은 계속되는 정화의식으로 인해 부유할 수밖에 없는 잔여물, 무쓸모의 잉여, 그렇지만 정화의식의 관제탑watch tower 범주 밖에서 항존할 수밖에 없는 그 어떤 것으로 엄존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기축으로서의 A는 그렇게 엄존하는 무쓸모의 잉여들을 왕따시키려는 고약한 이지메의 본능을 오늘 우리 사는 공동체,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에 강요함으로써 강요당한 비일상의 일상체들이 일상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비일상으로 무장된 모든 것들을 상대적 재앙의 숨 쉴 틈 없는 세속세계로 밀어 넣은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는 누구의 몫인가. 그리고 우리가 앞선 언급한 A가 스스로 함정에 빠지면서 함정을 함정으로 인지하게 못하게 조장하는 모든 배후 및 안팎의 구조들, 그로 인한 배제의 윤리학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부유하는 주체들은 과연 어떻게 정치와 관계 맺을 수 있는가. 정치는 결국 인간과 인간이 뒤섞인 객체인 주체들의 주체인 척 하는 상태을 지속하는 행위일진대 그 정치적 논리의 지속이 이른바 무쓸모에 대한 끊임없이 배제 및 정화의 욕구라면 그 욕망의 뒤편에서부터 이른바 현전現前 공간空間을 향해 육박해 오는 관계를 언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답은 ‘의미가 있거나 아니거나’ 이다. 이 때의 의미는 기축인 A가 포설해 놓은 그물망 안팎에 걸려드는 그 어떤 것이 아닌 상태인 것. 정확히 명명되고 정확히 지시되는 A의 손가락만을 따르는 지시체들이다. 이 경우 의미를 쫓지 못하는 타의에 의해 배제된 이 시대의 중얼거림과 울음들은 어떤 정치적 담론에서 이야기되어야 하는가. 그 이야기가 통념의 대화방식, 토론 문화를 넘어서서 비로소 이야기되기 시작한다면, 그리고 그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일 수 있다는 확신이 조금씩 우리의 영혼, 그 깊은 심연을 두드린다면, 그렇다면 그 자체로 이 글을 쓰거나 글을 읽는 청자이거나 화자인 나와 너, 우리들은 그 어떤 쓸모도 없지만, 그래서 하염없이 부유하고 명멸하는 빛의 스밈으로 잔류하겠지만 이러한 현장의 장에서 끝끝내 주체로 자리매김할 정치적 결사체로 육박해 들어올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정치적 상상을 가능케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부유하는 잉여로서 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 ‘어떤 것’의 뿌리는 그런 것이다. 




 

 

작성일 : 2018.03.01
저자 소개  

주원규
1975년생. 소설가. 철학박사. 편집동인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 제2회 간향건축문학상 (건축평론), 제2회 광주일보문학상(소설) 수상. 장편소설 『무력소년생존기』, 『너머의 세상』, 『망루』, 청소년소설 『아지트』, 『주유천하 탐정기』, 동화 『깜수네 집에 놀러 갈래?』, 에세이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평론집 『성역과 바벨』 출간.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bay31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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