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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러시아 지성사 산책] 사상의 정치, 정치의 사상: 다닐레프스키와 범슬라브주의(2)

최진석(문학평론가)


   다닐레프스키는 현대의 정치·경제·문화적 발전의 동인으로서 유럽적 원리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유럽은 러시아가 나아갈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이라고 서구주의자들이 상찬했던 것이나, 혹은 유럽이야말로 전통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주범이라 고전 슬라브주의자들이 적대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다. 왜 그랬을까? 다닐레프스키가 보기에 서구주의나 슬라브주의는 보편성에 결박된 포로란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았다. 헤겔의 적자를 자처한 서구주의는 물론이고, 슬라브주의자들조차 유럽적 보편성에 대항하는 러시아·슬라브적 보편성을 내세웠고, 경쟁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특히 후자들마저 (마치 유럽인들처럼!) 보편성은 단 하나만이 있을 수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자신들과 공존할 수 없는 유럽적 보편성을 타도하려고 했다. 하지만 보편성 따위는 없고, 단지 민족적 특수성과 고유성만이 있다면? 유럽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고유성이 있다. 마치 러시아·슬라브 민족이 그런 것처럼. 사정이 그렇다면 유럽을 특별히 애호하거나 적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유럽과 러시아의 상호 반목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표트르 이후 러시아는 끊임없이 유럽이 되길 갈구했고, 유럽은 언제나 러시아를 타자로 취급해 왔다. 다닐레프스키는 이런 현실적 적대야말로 유럽과 러시아가 서로 다른 존재임을, ‘보편’으로 묶을 수 없는 특수성들임을 보여주는 반증이라 여겼다. 보편 인류에 대한 전체 인류의 개념을 도출한 논리나, 서로 다른 특수성으로서 각 민족들의 삶에 대한 다닐레프스키의 통찰은 확실히 놀라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표트르 대제 이후 유럽화만이 유일하고 보편적인 발전이라 여겼던 러시아 지성사의 전통에 하나의 단절이 발생했음을 시사하며, 러시아가 근대성의 문턱 너머를 엿보았음을 직감하게 해주는 사실이다. 단지 이런 지적만으로도 후일 소비에트 시대에 󰡔러시아와 유럽󰡕을 반동적인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치부하던 관례가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는지 증명하고도 남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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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유럽민족(진홍빛이 슬라브족)

   각 민족이 자신의 삶과 운명을 개척하는 주체가 된다면, 그 양상은 어떤 것인가? 다윈주의와 사회 유기체설이 다닐레프스키의 사상에 깊이 녹아드는 부분이 여기다. 마치 개인의 삶이 그렇듯, 민족의 삶도 탄생과 성장, 사멸의 유기체적 과정을 밟지 않을 수 없다. 단, 이 과정은 유일한 것이 아니며 동시적인 것도 아니어서, 유럽인들의 역사를 러시아에 적용하거나 그 반대도 허락될 수 없다. 유럽적 보편주의나 도덕주의도 러시아에는 무용지물이다. 범슬라브주의에서 러시아가 중요한 이유는, 오로지 민족만이 역사-문화적 유형의 실체일 수 있으며, 국가라는 정치적 단위를 건설하는 모체가 되는 까닭이다. 국가를 이룬 민족만이 역사-문화적 유형의 담지자가 될 수 있었다. 내셔널리즘, 즉 국가와 민족은 하나의 단일체라는 관념이 지배했던 19세기의 전형적 태도가 아닐 수 없다. 국가라는 정치적 통합체를 이룬 민족만이 고유한 역사-문화적 실체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다닐레프스키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슬라브 민족 가운데 러시아 제국만이 온전한 국가적 형태를 이룬 실체였다. 걔중 인구밀도나 문화적 응집력에 있어 제법 덩치를 가졌던 우크라이나는 근대 국가적 단위로 통합되지 못했으며, 폴란드는 가톨릭화됨으로써 유럽의 정신적 식민지로 ‘전락’해 있었다(다닐레프스키는 폴란드를 ‘슬라브 세계의 유태인’이라고 폄하했다). 그 외의 지역들, 가령 남슬라브인들은 이슬람의 영향과 유럽의 지배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이는 소수성을 면하지 못한 사태였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역사-문화적 유형의 하나로서 슬라브 민족의 구심점은 러시아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한발 더 나아가 다닐레프스키는 러시아의 군주는 유럽의 군주들과 허울 좋은 동맹 관계 따위에 만족할 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로 진군하여 슬라브 민족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실리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주의의 원리를 국가정책에 적용할 때 유기체로서 민족의 보존과 번영이 성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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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닐레프스키

 


   이전까지 존재하던 10개의 역사-문화 유형에 뒤이어, 다닐레프스키는 슬라브 민족이 11번째 역사-문화적 유형을 구축할 것이며 그로써 지금까지 존재하던 유형들의 종합적 형태가 되리라 확신했다. 보편을 부정하던 그의 사상적 논리에 따라 슬라브 민족의 역사-문화 유형이 보편적이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다닐레프스키의 사상 체계에서 종합적이고 최종적 유형임이 은밀히 암시된 이 유형은 다분히 패권주의적이며 제국주의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이 정확히 지적한 대로, 추상적 개념으로서 역사-문화적 유형은 국가라는 구체적 현실을 통해서만 구현되는 관념적 이상형이며, 자연히 당대의 국제정치학적 역학관계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닐레프스키는 이론적으로는 유럽에 대한 냉연한 무관심을 표방했으나, 실제적으로는 배타주의와 쇼비니즘을 통해 러시아 중심주의를 구현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표트르의 근대 이래 러시아는 지나치게 유럽 중심주의에 경도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서라도 역방향의 진화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는 기괴한 논리를 펼치면서 말이다.

 

   󰡔러시아와 유럽󰡕이 진작시킨 범슬라브주의는 그 자체로는 하나의 사상에 불과하지만, 재기넘치는 착상과 비유 및 현실에 대한 웅변적인 수사법, 문화의 각 분야를 망라하는 방대한 예시 등으로 당대 지성계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세기 후반 러시아와 남·동유럽에서 벌어진 범슬라브주의 운동이 다닐레프스키의 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자신들의 정치적·사상적 기원으로 자인했던 것도 그런 탓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상은 추상을 떠나 구체적 현실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역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닐레프스키의 사상은 범슬라브주의라는 정치적 실천의 순수한 이론적 젖줄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문화적 유형론이라는 학문적 틀 속에서 세계사를 재편하려던 그의 야심은 실제 현실에서 걷잡을 수 없는 내셔널리즘의 흉기가 되어 휘둘러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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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쟈예프


   서구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슬라브주의 전통에서도 다닐레프스키에 대한 비판이 종종 제기되었다. 가령 니콜라이 베르쟈예프는, 문화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통찰을 제공했다고 자임하던 다닐레프스키에 대해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만약 유럽과 러시아가 그토록 구별되는 역사-문화적 유형이라면, 유럽 내의 프랑스와 독일은 과연 얼마나 서로 가까운가? 그들 사이의 대립과 차이는 유럽과 러시아 사이의 대립과 차이보다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더욱 커다란 구별을 내포할 것이다. 『러시아와 유럽』이야말로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 세대가 벌였던 논쟁의 연장선에 놓여있으며, ‘우리’와 ‘그들’, 즉 러시아와 유럽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추상화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이 지적에 수긍하는 순간, 우리는 다닐레프스키를 통해 탈근대의 문턱을 잠시 넘었던 러시아가 다시 근대성의 문제의식으로 귀환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작성일 : 2017.10.10
저자 소개  

최진석
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연구원. 2015년 《문학동네》 평론 등단. 웹진 <문화 다> 편집동인. vizari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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