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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의 아방가르드 주점] ‘이리’로 이끌고 입맞춤하는 시

- 이제니와 김상미의 신작시를 읽다


                                                  이성혁(문학평론가, 본지 편집동인)



   독자의 정동을 움직이는 시의 주술적인 힘은 구성된 말의 리듬에서 나온다. 현재 한국시단에서 말의 리듬을 가장 깊은 곳까지 밀고나가는 시인 중 한 명은 이제니다. 아래의 시는 <문학과 사회>에 실린 이제니 시인의 신작시 중 한 편으로, 길이가 긴 편이라 후반부만 인용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새들은 이리 와요
빛 가운데로 와서 편히 누워요
누워서 쉬어요 쉬었다 날아올라요
연기처럼
세월처럼
회오리치는
순간의
기적처럼
드러누운 자리에는 그림자의 기척이 있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은 묘목 사이로
얼굴은 얼굴로 슬퍼지네 슬퍼지네
깃털은 깃털로 반짝이네 반짝이네
별이 들어와 부서져도 모를 마음은
온통 어두워 기울어지는 마음은
날아올라 날아올라
새들은 이리 와요
이리와서 쉬어요
쉬다가 쉬다가
이내 무너져 이내 무너져
두려움 없는 오늘의 마음은
믿기지 않아
빛나지 않아
들어가고 붙잡고 나아가도
다시금 내려앉는 언덕의 빛
두려움을 버리는 옆의 자리에
힘을 내어 공명하는 순간의 소리가 있다고
마주 잡은 손 젖어드는 눈빛이 있어
거울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아도
이리로 와요
이리로 와서 쉬어요
쉬었다 쉬었다 날아올라요
두려움 없는 새들은
두려움 없는 오늘의 새들은
                       - 이제니, 「새들은 어서 와요」 후반부,   <문학과사회> 2017년 겨울호.  


   저 부드러운 말들, “빛 가운데로 와서 편히 누워요/누워서 쉬어요 쉬었다 날아올라요”라고 내 귀에 속삭이는 말들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부드러운 이불처럼 추운 마음을 덮어주는 말. 그렇게 마음을 따스하게 덥히는 말을 선사하는 능력이야말로 주술사로서의 시인의 능력 아니겠는가. 위의 시에서 화자가 말을 건네는 대상은 하늘을 날아다녀야 하는 새이지만, 그 새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고 있음은 누구나 감지할 것이다. 우리의 마음 역시 땅으로부터 유리되어 중력에 맞서 날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쉬지 못하는 존재, 빛의 온기를 온전히 받지 못하는 존재.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죽은 이들의 흔적이 찍혀 있기도 한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듯이. 위의 시에 따르면 우리의 ‘마음-새’가 “드러누운 자리에” 있는 “그림자의 기척”이 바로 그러한 흔적일 터, 삶의 이면이라고 할 그 그림자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죽은 묘목 사이”에서 현현하는 얼굴이다. 그 ‘새-마음’의 얼굴은 그 얼굴로 슬퍼진다. 죽은 이의 그림자인 얼굴의 현현으로 우리 마음의 얼굴은 “별이 들어와 부서져도 모를” 정도로 “온통 어두워 기울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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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그 ‘새-마음’의 귀에 반복하여 부드럽게 속삭인다. “새들은 이리와요/이리와서 쉬어요”라고. 이 반복하여 속삭이는 말의 리듬은 슬픔으로 어둡게 기울어지고 있는 고단한 ‘새-마음’을 따스하게 풀어주는 마력을 지닌다. 시인이 권유하는 그 휴식이 새로 하여금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진 않는다. 마음이 “어두워 기울어지는” 상황을 막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쉬다가 쉬다가/이내 무너져 이내 무너져”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휴식 속에서 우리의 슬픔은 마음의 바닥에까지 내려앉을 것이다. “언덕의 빛”은 “들어가고 붙잡고 나아가도/다시금 내려앉는”다. 그래서 어쩌면 휴식은 마음이 편하게 내려앉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럼으로써 휴식은 두려움을 없애준다. 마음은 더 이상 내려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무너진 마음들이 “두려움을 버리는 옆의 자리에/힘을 내어 공명하는 순간의 소리가 있”는 것이다. 그 공명의 순간은 거울을 마주하여 자신을 보는 시간과는 다른 시간이다. 그 순간에 우리는 타자와 손을 “마주 잡”고 우리의 눈빛은 타자에게 서로 젖어든다. 우리는 서로 타자와 감촉하고 섞여들며, 그래서 “거울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 그 공명에서는 시선의 시각마저도 촉감의 감각에 용해되는 것이다.


   시인이 새들을 불러들이는 매혹의 장소인 ‘이리’는 슬픔 속에서 마음 놓고 무너질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무너져 내림으로써 비로소 타자의 소리와 공명할 수 있는 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쉴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시’ 아닌가? 저 이리 오라고 유혹하는 목소리의 주인이 주술사로서의 시인이라고 할 때 말이다. 시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그림자의 기척에 따라 슬픔에 빠지고 무너질 터이지만, 그럼으로써 두려움을 버리고 타자와 공명하면서 감촉하고 타자에 젖어들 수 있다. 하여, 시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이제 “두려움 없는 오늘의 새들”이 되고, “연기처럼/세월처럼/회오리치는/순간의 기적처럼”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읽어보면, 위의 시는 이제니 시인이 현재 마음에 품고 있는 ‘시의 이상(idea)’를 보여주려는 시라고 생각된다. 이와 비교해볼 때, 아래 김상미 시인의 신작시는 현 시대의 시인이란 어떠한 존재인지 말하고자 하는 시로 생각된다.


너는 쓴다. 쓰고 또 쓴다
흰 장미와 분홍 장미
그 아래 무수한 하이에나들
그들을 비껴갈 행운은 어디에도 없고
부지런한 팽이처럼 돌고 도는
이별과 집착 그리고 날카로운 절망들
그 아래 흩날리는 냉담한 천사들의 미소
서로 서로에게로 넘나들지 못한 채 민감하게 사라지는
대책 없는 개개인의 평화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소스라치는 절망에, 환멸에
날마다 버스를 놓치고 기차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도
결국 발맞추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어제 구해준 사람에게 오늘은 맞아 죽을지라도
언제나 좋은 게 좋다는 그 함정 안에 옹기종기 모여
한 번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던 사랑을, 행복을 나불대는
마르고, 마르며, 말라가는 꽃송이들
그 아래 훌쩍이며 훌쩍대는 결박된 미래들

한없이 불안하면서도 한없이 방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어둡고, 어두운 개개인의 이름 석 자
고이 간직했던 지고지순한 문장들마저 비틀고 비틀어야만
점점 심장박동이 정상화되는 무미건조한 영양제들
그 아래 펑펑 울며 부서지는 이 시대의 인간 장난감들

너는 쓰고, 또 쓰고, 또 쓴다
붉은 피 냄새 진동하는 봄날의 키스
불행한 아이들을 모두 먹어치우고
반짝반짝 얼굴에 기름칠을 한
흰 장미와 분홍 장미
그 아래 무수한 하이에나들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단식투쟁을 하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발을 구르며
도취한 빙산처럼 조난 신호탄에 자신을 내다 맡긴 채
끝없는 폐허로 입맞춤하면서 이어지는 벽 뒤의 도시,
그 참혹한 꽃밭에서!
                               김상미, 「시인앨범 6」, <문학동네> 2017년 겨울호


   김상미 시인의 위의 시는 우선 그 활달하면서도 강렬한 어투가 나를 사로잡았다. 이 시에 따르면 ‘시인-작가’란 “쓰고, 또 쓰고, 또” 씀으로써 존재한다. 아니 시인이나 작가라는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쓰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자가 있다는 것. 그를 ‘쓰는 자’라고 이름 붙이자. 그런데 김상미 시인이 진단하는 현 시대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다.(그 곤란한 시대 상황이 ‘쓰는 자’로 하여금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진단하고 있는 이 시대, 그리고 이 시대 문학예술의 상황은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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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시에 등장하는 “흰 장미와 붉은 장미”는 우리 시대가 내세우는 아름다움이나 문학예술을 상징하고 있는 듯 하다. 시의 서두를 보면 그 장미 아래에서는 “무수한 하이에나들”이 으르렁거리고 있다. 사체를 뜯어먹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4연에서는 그 흰 장미와 분홍 장미가 하이에나들을 통해서 반짝거릴 수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장미들이 “반짝반짝 얼굴에 기름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불행한 아이들을 모두 먹어치”웠기 때문이라는 것, 그 아이들을 먹어치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장미들 아래 있는 “무수한 하이에나들”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쓰고 또 쓰는 행위란 저 장미들에 대항하는 일 아닐까. 이 불행을 잡아먹고 반짝거리는 아름다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된 사랑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장미들-꽃송이들’의 아름다움이란 “행복을 나불대는/마르고, 마르며, 말라가는 꽃송이들”인 것, 그것은 결국 아름다움을 메마르게 만들 거짓된 아름다움이며 그렇기에 미래를 결박시킬 것이다. “한 번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했던 사랑”의 행복이란 사랑의 습기가 없는 메마른 시간일 뿐, 그 메마른 시간에서 미래는 올 수 없는 것이다.


   김상미 시인이 진단하는 현 상황은 이 시대 삶이 처한 상황과 연관된다. “이별과 집착 그리고 날카로운 절망들”이 “부지런한 팽이처럼 돌고 도는” 이 시대의 삶. 개개인은 그 “소스라치는 절망”과 ‘환멸’에도 불구하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그들은 “날마다 버스를 놓치고 기차를 놓치고 사람을 놓치고도/결국 발맞추어 집으로 돌아오”는 온순한 수동성의 생활에 맞추어져 있다. 그들의 삶은 “좋은 게 좋다는 그 함정 안에 옹기종기 모여”서 “대책 없는 개개인의 평화”를 사는 삶인 것, 그 평화란 “냉담한 천사들의 미소”일 뿐이다. 그들은 “서로 서로에게로 넘나들지 못”하고 민감하긴 하지만 타인의 삶에 냉담하며 그 냉담함으로 삶의 평온을 지탱한다. 그렇게 그들 ‘개개인’의 사랑 없는 삶, “한없이 불안하면서도 한없이 방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어둡고, 어두운” 삶은 미래 없이 사라져갈 것이다. 다만 “불행한 아이들을 모두 먹어치우”면서 반짝거리는 자신의 얼굴을 뽐내는 장미들이 행복을 나불대며 그 삶을 정당화해줄 뿐. 그래서 저 장미와의 키스란 “붉은 피 냄새 진동하는 봄날의 키스”다. 봄날 저리 아름답게 피어나는 장미를 키운 것은 하이에나가 뜯어먹은 불행한 아이들의 붉은 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상미 시인이 생각하는 이 시대의 시 쓰기란 어떠한 것인가? 3연의 “고이 간직했던 지고지순한 문장들마저 비틀고 비틀어야만/점점 심장박동이 정상화되는 무미건조한 영앙제들”이란 표현은 사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시 쓰기가 처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불안과 방관의 삶에서 지고지순한 문장들은 사랑의 습기를 잃는다. 삶은 그 문장들을 비틀어야지만 겨우 지탱될 수 있다. 그래서 이 비튼 문장들은 “무미건조한 영양제들”일 뿐이다. 이 영양제들이 우리 시대의 시를 지칭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그 ‘영양제들-시’는 이 시대 삶의 슬픔을 말해준다. 그 ‘영양제들-시’는, 그것들을 통해 지탱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시대의 인간 장난감들”임을 말해줄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김상미 시인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의 시인은 “어쩔 수 없이 단식투쟁을 하고 인간 사실을 만들고 소리치고 발을 구르며” 조난 신호를 보내는 자이다. 그 시인은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사랑하고 싶어”하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사람이기에, 사랑이 불가능해진 이 시대에 조난 신호탄을 쏘듯 글을 쓰고 또 쓰는 자다.


   김상미 시인의 ‘시인’은 저 거짓되고 폭력을 품은 “참혹한 꽃밭”인 “벽 뒤의 도시”에서” “끝없는 폐허”로 존재하며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으로 세상과 입 맞추고자 한다. 이 시대에 내세워진 장미들의 아름다움이 거짓되고 메말랐으며 참혹한 것이기에 이 속에서 “쓰고, 또 쓰고, 또” 쓰는 ‘너-시인’은 그 장미들과는 반대로 폐허로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는 폐허임으로 사랑을 원하며 끝없이 참혹한 세상과 입맞춤하며 사랑의 아름다움을 재건하고자 한다. 그는 폐허이기에 장미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흉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비록 장미처럼 반짝이지 못할지라도, 폐허로서의 시인은 이 세상과 입맞춤함으로써 미래를 결박한 메마른 행복으로부터 시간을 해방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김상미 시인은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입맞춤의 행위가 쓰고 또 쓰는 시 쓰기를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읽어보니 위의 시는, 이 시대 시의 현재성을 보여주고자 하는 시라는 생각이 든다. 시의 현재성이란, 기만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우리가 폐허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수동적이며 메마른 삶을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시가 찾고자 하는 데서 획득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 이 글은 <발견> 2018년 봄호에 실린 필자의 「그림자에서 가시화되는 한국시의 현재성」 일부를 수정한 것입니다.





작성일 : 2018.04.11
저자 소개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화 다》 편집주간.
1999년 《문학과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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