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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의 서도락(書道樂)] 다른 시선이 만들어내는 입체적 세계, 비체들의 꿈

-김행숙 시편들에 대한 소고(小考)


                                                  김지윤(문학평론가, 시인) 



1. 평면적 세상을 만드는 ‘시선’의 획일성


  둘이 마주보고 있을 때 시선은 얽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 어긋나고 있다. 그것은 시선의 운명이다. 서로 바라보고 있는 순간에도 상대가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어떤지 나는 잘 알 수가 없다. 같은 곳을 바라보아도 각자의 시선은 서로 다른 곳에 부딪치며 굴절된다. 상대의 눈빛이 지금 무엇을 읽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타인의 시선은 늘 안개처럼 불투명한 상태 속에 깊고 모호하게 잠겨 있는 것이므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선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상대가 바라보는 세계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상호적인’ 관계는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두 눈은 떨어져 있어서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보는 이미지는 같지 않다. 심지어 한 사람의 똑같이 생긴 두 눈도 서로 다른 위치에 그 시선이 닿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은 분명 나와 다를 것이다. 이 시선의 차이로 말은 엇갈리고, 기억은 각자의 페이지에 서로 다른 자국을 남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두 눈이 각자 자기만의 상(像)을 보는 이유는 두 개의 다른 이미지들이 합쳐져야만 비로소 사물을 입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눈이 똑같은 상을 본다면 그저 평면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세상이 평면적인 것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있는 입체로 양감을 가지게 하려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달라야 한다고.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평평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인간들은 평면적 성격(flat character) 속에 갇히기 쉽고 그들의 생각은 단순화되어 스키마에 빠지기 쉽다. 


   스테레오 타입 안에 들어가는 것은 편리하고 쉬운 일이기 때문에 선호된다. 그 안은 안온하고 편안하다. 평평한 것들은 쉽게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고, 설명은 생략되며 친숙하여 두렵지 않다. 


   평평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든 곳이 균질적이고, 모든 것이 다 하나의 지평 위에 있다는 뜻이다. 즉, 모든 것은 가시적이고 이해 가능해야 하며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지평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이 평평한 세상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하는 제1요건은 ‘같은 시선’이다. 동일한 것을 바라보며 어긋나지 않는, 같은 눈빛의 시선을 가진 얼굴은 친숙하며, 그들이 짓는 표정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선의 자연스러운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시선의 운명’을 거스르는 일이다. 입체적인 세상은 서로 ‘다른 시선’을 요한다. 그러려면 ‘모르는 표정’이 필요해진다.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빠진 게 있을 거야

코로부터 넘친 코,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면 결국 코가 없고
귀로부터 넘친 귀, 귀에서 귀까지 귀를 막고 뛰어가면 세상은 온통 귓속 같고
입을 꽉 다물면 이빨은 자라지 않고, 편도선은 부풀지 않는다, 거품은 일지 않는다

사진 속의 파도처럼 내 혀는 꼬부라져 있네
얼굴을 침실처럼 꾸미고, 커튼을 내리고, 나는 혀를 달래서 눕히네
나는 사탕같은 어둠을 깔고

나는 당신이 모르는 표정을 짓지만
내 얼굴엔 무언가 남아도는 게 있을거야

여관 여주인처럼 자다 깨어, 자다... 열쇠를 건네네
빈방 같은 눈동자
소파같은 얼굴
그리고 샤워기 밑에서 50분 동안 비 맞고 서서

얼굴로부터 넘치는 저 얼굴,
닮은 얼굴을 하고 비를 피하네

얼굴을 차양같이 꾸미고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꾸미고
                        -  「해변의 얼굴」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


   낯선 시선이 있는 얼굴은 ‘모르는 표정’을 만들어낸다.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는 것들은 늘 ‘넘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넘치는 잉여, “남아도는” 것들은 풍부한 감각과 풍요로운 시선을 만들어낸다. 


   “코로부터 넘친 코”, “귀로부터 넘친 귀”는 온갖 냄새와 소리들을 세상에 가득 차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넘치’지 않도록, 정해진 한계를 요구한다. 사회가 정해놓은 한계치까지만 도달할 수 있도록 “코에서 코까지 앞만 보고 달려가”게 하고 “귀에서 귀까지 귀를 막고 뛰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까지”를 전제하고 나면, 한계를 정해놓은 감각은 닫히게 된다. “입을 꽉 다물면 이빨은 자라지 않고, 편도선은 부풀지 않는다.” 그렇게 안전한 침묵과 승인 속에서 세상은 움직임을 멈추고, 정지되며 마침내 평평해진다. 


   이 한계로 인해 시적 화자는 “얼굴로부터 넘친 얼굴”을 가지기엔 빠진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르는 표정”을 가지고서는 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비가 쏟아지는 밖에서, 비를 막아주는 지붕이 있는 실내로 들어가 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환대를 받으며 문으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으려면, “닮은 얼굴”이라는 가면을 써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얼굴을 꾸민다. 타인에게 낯설지 않은, “닮은 얼굴을 하고 비를 피하”기를 선택한다. ‘나’는 누구든지 두려움 없이 ‘나’에게 오고 갈 수 있도록 “여관 여주인처럼” 타자들에게 열쇠를 건넨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빈방 같은 눈동자”, 누구나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소파같은 얼굴”이 되어야 한다. 


   모르는 표정은 이제 사라진다. 남아도는 것들은 깊이 숨겨지거나 제거된다. 대신 “차양같이”, “그리고 오늘은 얼굴을 베란다같이, 해변같이, 모래알같이” 끝없이 꾸미고 바다를 찾아오는 피서객 같은 타자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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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동체 속 비체(abject)의 꿈과 ‘친밀한 타자’의 회복


   공동체 속에서 ‘동일하지 않은’ 것들은 종종 배척의 대상이 된다. 쉽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의 대상들, 흔하고 익숙한 것들은 공동체 내에 자기의 자리를 만들기 쉽지만 낯설기 때문에 불편한 것들, 다르고 특이한 것들은 종종 성원(成員)들의 폐쇄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유령’처럼 살아간다. 

 

   이들은 어떤 이념이나 스키마로 설명할 길이 없는 유령 같은 존재인 ‘비체(abject)’다. 다음 인용 시 구절 두 개를 읽으면 시인이 생각하는 ‘유령’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신과 당신의 유령이 함께/ 아른거린다./ 왔군요,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 여섯 번째 감각처럼/ 나는 더 아래에 있거나/ 더 위에 있다. 이곳은? 이곳은?// 파악하고 싶어요/ 전부 알고 싶어요/ 더 아래로 떨어질까요? 더 위로 기어 올라갈까요? (「식스센스」, 『에코의 초상』, 문학과 지성사 2014)
 
얼굴을 벗어나는 얼굴은 유령처럼/ 없는 듯하고/ 무해하고/ 놀라운 것이다// 비명을 지르며 너의 놀람을 표시했을 때/ 너를 놀리며 달아나는 꼬마들도 없었을 때/ 너는 조용해지고// 세계는 단순한 윤곽을 드러낸다” (「검은 해변」, 『이별의 능력』, 문학과 지성사 2007)

 

   유령은 “식스 센스”를 가진 것들이다. 즉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오감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사회가 정해놓은 어떤 ‘선’이 있다면, 그 선을 쉽게 넘어 다닌다. “더 아래에 있거나/ 더 위에 있”는 것들이므로 그들은 자유롭게 움직이고 변화할 수 있다. 무지와 타성에 젖은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흘러들고 세상이 정해놓은 한계를 빠져나가며, 세계의 진실을 파악하려고 한다. 


   시 「검은 해변」에서도 다시 “얼굴을 벗어나는 얼굴”이 등장한다. 유령과 같은 이 ‘비체’는 인정받지 못해 유령같이 떠돌고 있기 때문에 “없는 듯” 느껴지지만 분명 존재하며 ‘동일성의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므로 “무해하고 놀라운 것”들이다. ‘같다는 것’에는 하나도 놀랍지 않지만, 다르다는 것에서는 놀라움이 생겨난다. “비명을 지르며 너의 놀람을 표시”하는 순간, 다르다는 것을 비웃는 이들도 없어지는 순간. 세계는 평평한 것이 아니라 “윤곽”을 가진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시선”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김행숙 최근에서 발견되는 ‘다른 면’에 대한 성찰은 그간의 시인의 시적 여정이 다다른 자리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본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앞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뒷면.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뒷면과 열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의 앞면.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
                              -김행숙,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 『현대시』, 2017. 4월호

  
 우리는 모두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하나의 면일 뿐인데 사람들은 모두가 다양한 다른 면을 가지고 있고, 숨겨진 면들이 있다. 즉, 모든 사람은 모든 다른 이에게 미지(未知)의 대상이다.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므로 “볼 수 없는 것을 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보지 못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때로 두렵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우리의 시선이 어긋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같은 시선’을 가지기를 거부해야 한다.


나는 신발이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나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그 곁에서 밤이 슬금슬금 기어나오고 있습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었습니다/ 책들이 불타는 밤입니다/ 말들이 파도처럼 부서지고/ 긁어모은 낙엽처럼 한꺼번에 불타오르는 밤, 뜨거운 악몽처럼 이것이 나의 밤이라면 저 멀리서 아침이 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아침 햇빛이 내 눈을 찌르는 순간에 검은 보석같이 문맹자가 되겠습니다/ 사로잡히지 않는 눈빛이 되겠습니다/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것이 나의 저녁이라면, 『유리의 존재』, 문예중앙, 2016


   동일성의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을 벗어나기 위해 차라리 “신발이 없는”, “국가도 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선언은 ‘비체’로서의 선언에 다름 아니다. “기억의 국정화가 선고되”고 “책들이 불타는 밤”을 맞아 순순히 그 어둠에 복종하기보다는 아침을 기다리며 “사로잡히지 않는 눈빛이 되겠다”,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겠다”며 “뜨거운 악몽”과 같은 시대와 불화하려는 정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침 햇빛’이다. 아웃사이더로, 비체로,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면서 평화를 가져올 수 있으려면 똑같은 어둠으로 싸우려 하기보다 빛으로 맞서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나”와, 혹은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가 폭력의 욕구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상대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것들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정함”이다. 그래서 시인은 “다정함의 세계”를 지향한다. 다정함은 ‘순수한 환대’를 이끌어낼 수 있으므로, 공동체의 폐쇄성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힘을 준다. ‘환대’는 배제당한 자들 앞에 놓여 있는 벽을 무화시키거나, 그 벽을 넘어갈 수 있게 한다.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중략)..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 「다정함의 세계」 부분, (『이별의 능력』 , 문학과지성사, 2007)


   시인은 이 ‘다정함의 세계’를 이루는 목소리가 “작은 목소리”라고 말한다.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고. 여기에서 절대적이고 억압적인 ‘큰 목소리’는 필요 없다. 오히려 작고 알아들을 수 없는 잡음들이 뒤섞여야만 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음과 같은,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가득한 잡음, 소음같은 다수의 “작은 목소리”들은 함께 뒤섞여 ‘주체의 경계’가 희미해져가지만,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로 살아남아 공존한다. 공동체 속에서 비체들이 꿈꾸는 “다정함의 세계”는 사회가 기입해준 모든 ‘대문자의 지식’을 지우고 다양한 소문자의 목소리들로 가득 채우는 데서 시작된다.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저항의 힘으로 돌아올 수 있는 비체들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다른 타자들과 연대하고 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생겨나는 진정한 ‘소통’은 “수평선처럼 누워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와 같이 ‘평평한 세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지평을 만들며 ‘솟구쳐 오름’을 보여준다. 세상은 유쾌하게도 울퉁불퉁해진다. 다양성이 인정되는 이 ‘입체적인 세계’에서 나와 너의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벽이 없어지기에,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 그들의 발은 그 따뜻함 속에 녹아든다. 배제된 비체들이 더 이상 떠도는 유령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 함께 머물 수 있는, 그런 “다정함의 세계”의 도래를 이 시는 꿈꾸고 있다. 그런 세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려 애쓰고 있다.


(『실천문학』 겨울호, 2017 의 기획특집 원고의 일부를 개작, 내용 추가하여 다시 씀)




작성일 : 2018.03.19
저자 소개  

김지윤
1980년생. 시인, 문학평론가. 책임 편집동인.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2006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부문 수상, 2012년 '시와 시학상 젊은 시인상' 수상, 시집 『수인반점 왕선생』, 문학박사, 숙명여대 강사. sincethe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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