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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의 쓸쓸한 날] 멈출 수 없는 싸움 (2)
-백무산론  

문종필(문학평론가)


 


3. ‘나’와 ‘나’ 

 


  이전보다 더 큰 외부의 저항이 있지 않는 한 고유한 물체의 성질을 유지하려는 관성의 법칙은 한 시인에게도 동일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옛 골목에 갔었네」라는 시에서 시인이 골목을 찾은 이유는 “습기가 그리워서”(⑧:「옛 골목에 갔었네」)이다. 여기서 습기는 구급차가 들어오고 나가는 곳이 곧바로 장례식장이 되는 장소이며, 정부 보조금으로 간신히 숨이 붙은 낡은 공단 뒷골목이다. 이처럼 시인의 몸은 지난 과거의 관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기억하는 몸이 “부끄러워 감추던 몸 / 낮은 곳에서 웅크리던 몸 / 드러내면 부정해지는 몸 / 노동에 뒤틀린 몸”(⑨:「여신상」)이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도주할 수 없다. 비유하자면 질량의 무게와 가속도가 지독하게 큰 탓에 이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수동적인 몸이 된 것이다. 


   초기 시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외부를 향한 전투적인 전사의 목소리는 잠잠해졌고 그 이후,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바로 그였다. 싸움의 대상은 유동적이었으나, 이제는 친근하면서도 낯선 대상인 “의지도 저항도 다분히 타성적”(⑨:「허공 기차」)으로 만들어 버리는 화석 같은 흔적과 대면하기에 이른다. 이 대면의 흔적들은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밀고 당기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체험의 결과물이다.


하필 몸은 허기진 시절만을 그리워하는 걸까 / 몸이 떠올리는 건 왜 모두 쓸쓸한 것들일까 / 거리를 지나다 철공소에서 들리는 그라인더 소리나 / 시너 냄새에서나 추억을 떠올리는 / 몸이여 / 참 미안하다 / 나를 먹이려고 땀과 아픔을 바치고 / 굴욕과 죄도 달게 삼켰지 목구멍뿐 아니라 / 사랑도 변변찮아 네 뜨거운 출구도 쓸쓸하게 두었지 / 그래도 넌 비열한 곳에 가서 줄을 서려고 안달하지 않았지 / 그래서 비겁했고 오래 괴로웠던 내 / 몸이여 / 이제야 처음으로 지친 / 널 안아본다(⑧:「몸이여」)         


  몸과 정신은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이 두 영역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청각으로 박힌 ‘철공소 그라인더 소리’와 후각으로 흘러들어온 ‘시너 냄새’를 몸은 생생히 기억한다. 땀과 아픔은 물론 굴욕과 변변치 않은 사랑마저도 온전히 버텨야 하는 가련한 몸이었으며 당당하기 위해 비겁해야만 했던 딱한 사정을 가진 몸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러한 자신의 몸을 처음으로 안아본다. 한때 세상과 치열하게 싸웠던 몸으로 인해 얻어야 했던 상처였기에 늦었지만 지금에서야 자신의 몸을 돌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여유는 오래 머물지 못한다.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던 지난 감각들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네가 떠났으므로」에는 지난 과거의 관성만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 시인의 절망적인 의식이 담겨 있다. 이 시편에서 ‘너’라고 하는 인물은 외부의 타자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와 상이한 자신을 의미한다. ‘네’가 떠났기 때문에 시인은 꽃을 필요로 하지 않고, 이 세상에 해가 질 필요도 없으며, 눈물 또한 흘릴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적는다.  


네가 떠났으므로 / 나는 이미 내가 아니기에 // 남은 건 다음생이기에(⑧:「네가 떠났으므로」)         
                  
  동일하지만 ‘나’와 같지 않은 ‘나’가 떠났기 때문에 ‘나’와 만날 수 없어 다음 생을 기다린다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다음 생을 기다린다는 미래지향적 의지에서는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부여잡던 끈을 놓아 버리는 것 같은 시인의 태도가 느껴진다. 지금 시인의 상태는 무기력하다. 정말로 다음 생을 기다리는 것일까.


나는 사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  민들레 필 때 다르고 서리 내릴 때 다르다 / 새 한마리 잡아먹고 나는 달라졌다 / 아프리카 다큐 한편에 나는 달라졌다 / 주정뱅이의 지나가는 말 한마디에 나는 달라졌다 / 포르노 한편 보고 나는 달라졌다 / 민주정부가 거짓말을 했을 때 나는 달라졌다 / 로런스를 읽고 늦은 나이에 나는 달라졌다 / 나는 사소한 일에도 달라진다(⑧:「존재여행」)           


  하지만 시인의 몸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의 몸은 지난 과거에 묶인 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여전히 민감하게 열려 있는 몸이기도 하다. 늘 항상 열려 있었던 탓에 새로운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꿈꿀 수 있는 몸짓과의 만남을「잃어버린 새」와「눈이 내리면」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새를 두 손으로 잡고 새의 온기를 느낀다. 그리고 체온이 느껴지는 것을 직감한다. 무게는 없지만 부피만이 존재하는 새의 모습에 신기해한다. 다가가 새의 심장을 만져본다. 그때 온몸이 떨리는 경련을 경험한다.「잃어버린 새」의 제목에서 ‘잃어버린’은 자기 자신을 의미한다. 새의 심장 소리로부터 느꼈던 촉각적인 순간의 떨림을 다시 재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몸 안에서 잃어버린 새를 찾을 수 있을까”(⑧:「잃어버린 새」)라고 적었는지 모른다. 이 ‘경험’은 일상적인 체험과 구분되는 것으로 지난 시절에 겪었던 폭발적이고 충격적인 경험과는 형식이 다를 뿐,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그것을 쫓고자 한다. 하지만 시인은 여전히 경계에서 위태롭다. ‘나’와 다른 ‘나’에게 다음과 같은 무게로 질문을 반복한다.


오래된 것인 듯 내 안에 가득 든 울먹임의 정체는 무엇일까 / 등뒤에서 숨죽여 글썽이는 이는 누구일까 / 나는 어느 곳에서 이곳으로 떠나온 것일까 / 왜 아직 이곳에 있는 거야! / 그렇게 적막한 소리로 울먹이는 / 저 희디흰 빛깔은 누구의 목소리일까(⑧:「눈이 내리면」)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는 등 뒤에서 숨죽여 눈물을 글썽이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인은 그 대상에 대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왜 아직 이곳에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이 목소리에는 나와 다른 나에 대한 안쓰러움과 만남이 동시에 들어 있다. 내 안에 있는 ‘나’와의 대면은 이처럼 아프다.



4. 다시, 진격!  


  지난날의 싸움은 혹독했으며 고통스럽고 잔인했으며 화려했다. 죽고자 했을 때 그 누구보다도 살아 있음을 느낀 자신의 몸에 대한 기억은 불합리한 시대 탓도 있었고, 그 사회 안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했던 시인의 의지도 있었다. 이러한 흔적을 매개로 자기 자신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그 누구도 추억만을 바라보며 살 수 없다. 추억은 정지된 것이며 지금으로부터 어떠한 돌파구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지 못한다. 추억의 주변을 서성인다는 것은 이미 죽은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다. 몸이 도구인 시인은 자신의 몸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지금, 여기’는 모순적이고 괴기스러운 적과의 대면이 이루어질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사회는 전면에서 개인을 짓밟을 뿐만 아니라, 신체의 미세한 습관마저도 기묘하게 조작하고 통제하는 수준까지 진화했다. “인체의 굴곡 따라 설계된 침대처럼”(⑨:「작성된 신」) 우리의 불안도 적당히 타일러 줄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착취당할 능력”(⑨:「꽃이 나를 선택한다」)이 있는 동안만 생존이 허용된다. 더욱더 잔인한 것은 “자유를 팔면 자유보다 귀한 것을 얻을 수 있다”(⑨:「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는 알겠으나」)는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생존을 위해 자유를 기꺼이 반납할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 우리는 던져져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문제들을 논함에 있어 너무 쉽게 외부의 적만을 비판한다는 점이다. 적은 외부에 있고 그것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적이 오로지 외부에만 한정되어 있을까. ‘나’라는 존재는 힘이 없고 약하고 여린 존재라는 확고한 믿음 덕분에 진실처럼 느껴지는 환상이 아닐까. 이것이 환상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실재의 메커니즘이라 하더라도 부정되어야 한다면, 전면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오로지 외부의 적을 향해 침을 튀겨가며 소리 지른다면 나와 연결된 사회와 더 나아가 지구 전체 그리고 우주의 원리들에 대해서 무심한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적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는 것이 폭력보다 더 큰 폭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거부하는 현존의 접촉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식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주체의 시선이 강조되는 거리는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반성을 이끌어 내지 못하게 한다. 적이 외부에 있다는 생각은 오염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외부의 적만을 비판 대상으로 삼게 만들어 내 어깨에 쌓인 편견과 아집을 털어 낼 수 없게 만든다. 시인이 강조한 ‘연민’은 어떠한가. “연민이 아니고서 / 우리를 구할 물건이 /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⑤:「초심」)라고 적기도 했지만 연민만으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연민은 지극히 내부가 아닌 외부에 쏠린 감정이기 때문이다. 연민은 나와 유사한 어떤 대상과 견줄 때, 발생하는 슬픈 감정으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 감정은 먼지처럼 사라진다. 타자에 대한 나의 슬픔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내 안에 있는 연민은 언제든지 다른 것으로 돌변하고 만다. 마음이 변한 후, 그 대상을 쳐다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시인은 자신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인이 질문한 것이 외부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부(‘나’)의 문제를 끌어안고 간다는 점이 아니다. 이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내면’의 문제에 만족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내면의 반성 위에서 자신을 새롭게 무장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신’을 반복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복하고,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은 반복의 무한대다! 이 지점은 ‘나’를 새롭게 극복하는 순간이며, 이 순간은 우리를 ‘실천’이라는 장소로 데려다준다.


오랫동안 심장이 뛰지 않은 채 한곳에 머물렀던 적도 있다 //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정이 나를 해체하는 건 아니다 / 나의 심장에 햇볕도 기쁨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 오직 너를 쬐어야만 할 때가 있다 / 먼 대륙의 바람이 심장을 자주 달구었지만 나는 떠날 수 없었다 /  너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너의 체온이 나의 체온이므로 / 낮고 어두운 곳에서 울고 있는 너 때문에 / 너의 차디찬 피가 멈추었던 내 심장을 뛰게 했으므로(⑧:「너를 쬐어야 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심장이 뛰지 않았다는 시인의 고백을 확인할 수 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는 것은 역동적인 심장으로 시를 쓰는 시인들에게는 숙명의 정지를 의미한다. 시가 쓰이지 않는 시대는 유토피아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는 결핍이 없고, 부조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가 쓰일 필요가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이러한 유토피아와는 거리가 멀다. 세상은 여전히 불합리하고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뛰지 않고 있는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불러내는 지금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이다. 이것은 ‘너’에 ‘오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점에서 초월적인 대상으로 간주될 수도 있지만 관성의 힘으로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나’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의 ‘나’와 과거의 ‘나’가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교접의 지점에서 심장을 다시 뛰게 할 수 있는 기관차의 엔진을 수리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지난 과거의 지독했던 관성을  멈추는 방법은 이전 관성보다 더 큰 경험과 만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외부에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하다. 외부에 있지 않다는 것은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나에게 주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으러 안으로 깊게 들어가 다시 뛰는 심장과 만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거의 관성이 그를 동여매고 놓아주질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 / 숲에 사는 것들 모두 몸을 바꾼다 / 잎을 떨구고 털을 갈고 색깔을 새로 입힌다 / 새들도 개구리들도 뱀들도 모두 카멜레온이 된다 / 흙빛으로 가랑잎 색깔로 자신을 감춘다 //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 나이도 천천히 묽어진다 /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 바람에도 나를 감출 수 있도록 // 그러나 이것은 위장이다 / 내가 나를 위장할 뿐이다 / 나는 언제나 고요 속에 온전히 있다 / 봄을 기다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 나고 죽는 건 가죽과 빛깔이다 //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 내가 계절이다 // 늙지 마라 /
어둠도 태어난다(⑧:「내가 계절이다」)  


  시인은 늙었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몫을 해내려고 한다. 계절이 변함과 동시에 숲이 변하듯이 자신의 늙음도 이와 같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변화는 외모가 계절과 같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시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늙지 마라 / 어둠도 태어난다”라고. 이것은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기보다도 어둠 속에 담긴 잠재성의 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반복의 반복-을 통과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5. 싸움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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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시집인 『폐허를 인양하다』에서는 능동적이고 우직한 시인의 모습과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치『만국의 노동자여』시절의 그와 만나는 것 같다. 모두가 안식의 바다를 원할 때 “갈라진 목구멍을 향해 달려가는 강”(⑨:「완전연소의 꿈」)이 물의 생명 지점이라는 것을 그는 굳게 믿고 있고, 생존을 위해 자기 자신을 지키기보다는 “내 생의 최대의 불안은 내 모가지가 든든히 붙어 있는 거였다”(⑨:「참수」)라는 발언처럼 “더러운 체제에 기생”(⑨:「참수」)하는 것을 거부한다. 이러한 시인의 목소리는 매우 강력하다. 강렬한 목소리 이면에는 ‘의미’로 남고자 하는 욕망마저 증발해 버렸고, 특정한 대상을 쫓기보다는 ‘과정’ 속의 힘을 믿고자 한다. 더욱이 이 의지는 ‘나’를 ‘나의 이름’으로부터 분리시키기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 이름을 부여받지 못할지라도 / 백비가 되어 서 있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시의 운명”(⑨:「시총과 백비」)이라고 대답하는 순간 그의 싸움은 예전과는 다르게 적힌다.
  어느 순간부터 원점의 중심부에는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나’가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을 의심하지도, 걱정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시인은 젊은 시절의 또 다른 ‘나’로 변주되었다. 자신의 행위가 “하찮은 몸짓”(⑨:「뭔가를 하는 거다」)이라 할지라도 “누군가의 숨구멍”(⑨:「뭔가를 하는 거다」)이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에서 진격은 다시 시작된다. 물론, 혼자서 그 진격의 책임을 짊어지고 나가는 것은 아니다. ‘망각’되어 버린 “기억의 소수자들”(⑨:「기억의 소주자들」), “기억의 권위에서 버려진 것”(⑨:「기억의 소주자들」)들을 불러 내 일으켜 세운다. 


  ‘나’의 모습이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 ‘낡음’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나’를 반복하는 것은 그 자체로 값지다. 이 행위는 자신이 믿었던 처음의 마음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몸짓을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글에서 인용하고 있는 백무산의 시집은 ①『만국의 노동자여, 청사, 1988; ②『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노동문학사, 1990; ③『인간의 시간, 창작과 비평사, 1996; ④『길은 광야의 것이다, 창작과 비평사, 1999; ⑤『초심, 실천문학사, 2003; ⑥『길 밖의 길, 갈무리 2004; ⑦『거대한 일상, 창작과 비평사, 2008; ⑧『그 모든 가장자리, 창작과 비평사, 2012; ⑨『폐허를 인양하다, 창작과 비평사, 2015 이다. 이하 인용 시에는 괄호 안에 시집의 번호와 제목을 병기하도록 한다.

 



 

 

-끝-


작성일 : 2017.12.27
저자 소개  

문종필
문학평론가. 웹진 <문화 다> 책임 편집동인. 1980년생. 문학평론가. 2017년 <시작>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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