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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필의 쓸쓸한 날] 멈출 수 없는 싸움 (1)



  -백무산론  

문종필(문학평론가)


질식해서 죽을 것 같은 야수 한 마리 끄집어 내봐야겠다.

/ 나를 잡아먹도록(⑨:「변신」)

   

무모한 시도 

 

  싸늘하고 서글픈 주체가 절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찢어진 심장의 언어를 토해내는 것이다. 그것이 자의적이든 타의적인 방식에 의해서든, 주체는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버틸 수 없는 몸을 가졌기 때문에 몸부림치며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해야만 했다. 



   음악이 리듬과 선율로 웅크린 몸을 춤추게 하고 이 움직임이 다시 음악이 되는 경우나, 현란하게 움직이는 붓 터치가 화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도, 감독에 의해 배우들의 몸짓과 카메라 렌즈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것 또한, 표현이라는 맥락에서 피할 수 없는 저마다의 독특한 ‘형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별적이고 고유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은 교환 불가능한 결의 수만큼 다양하게 적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장르’라는 단어로 구분 짓고 경계의 감옥으로 밀어붙여 가둘 수 있겠으나, 결국엔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길을 걷게 된다. 경계는 경계일 뿐. 경계의 흔적들은 결국 하나의 출발지점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작은 동일했으나 적히는 방식과 담고자 했던 용기가 달랐던 탓에 미세하게 갈라지기 시작한 미분화된 것 안에서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그 속에서 일군의 시인들의 언어는 ‘상투적’이고 ‘투박한’ 것으로 명명되거나 시대적인 시간관 속에 손쉽게 묶인 채 서술되곤 했다.

 

   표현한다는 것! 이 지면에서 다뤄지게 될 내용은 상투적이고 투박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시인의 멈추지 않는 싸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동시’의 종언이 선언되고, 이 종언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노동시’의 정점으로 불리는 백무산을 다시 반복한다는 것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백전백패의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물러설 수 없는 것은 그의 행위가 여전히 불가능하더라도 ‘해야 한다’라는 당위에서 끊임없이 세상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투박하고 거친 이 ‘의지’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읽기의 반복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학적인 ‘잣대’ 자체에 대한 질문을 포기함으로써 치열하게 싸운 전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다소 과격한 이러한 질문들은 지나치게 거칠거나 모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수를 상정하고 밀고 나가지 않는다면 기존의 미학적 관성의 힘에 의해 전사의 몸짓은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진다.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안티고네의 여정이라 할지라도 이 행위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시냇물에 물고를 트는 시작 지점이 될 수 있다. 이 시작점에서 이 글은 바다의 항해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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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짓눌린 감정 

 

   자신을 호명해주지 않거나 무관심 속에서 홀로 외롭게 서 있던 존재에게 말을 걸어 준다면 그 대상은 기쁜 마음으로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를 것이다. 혹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이름을 불러 준 존재에게 다가가 입을 맞출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힘을 명명 행위라고 부른다. 인간이 유일하게 신에게 물려받은 능력! 바로 그것은 사물이나 대상에게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는 명명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 대상은 원하지 않는데, 함부로 이름을 부르거나 잘못된 이름을 붙여 준다면 구겨진 눈빛과 차가운 반응을 감당해 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꽃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 있어서도 “억지 이름 달아”(④:「이름」) 버리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이름을 더하는 행위에 의존하기보다는 “오늘도 나는 당신 이름을 어떻게 잊을까”(④:「이름」)라는 물음처럼 대상을 지움으로써 그 대상에게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름을 지우는 행위는 어쩌면 그가 노동 현장에서 배운 체험의 결과물인지 모른다. 



   가진 자들은 노동자들을 ‘산업전사’라고 불러대곤 했다. 이름 붙였던 자들은 가난과 질병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격려하고, 자신의 빌딩과 부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사람들이다. 이에 대해 시인은 “그렇다 우리는 전사이어야 한다 / 가난과 수모와 철창과 위선자를 / 쳐부수는 노동전사”(①:「전진하는 노동전사」)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시인은 이름을 찾기 위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기 위해 산업전사가 아닌 노동 전사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전사로서의 삶은 어땠을까. “숲으로 가는 길은 세상을 등지는 일”(④:「세상의 중심은」)이 아니라고 역설하기 이전의 삶은 어떠했을까. 그가 전사로 생활하던 터전은 “식은 밥덩이 말아 먹고 / 지옥 같은 공장을 향해도 / 손목이 날아가고 목숨을 잃어도 / 여전히 말이 없던 낡아빠진 하나님”(①:「저녁기도」) 밖에 없는 장소로 적힌다. 하지만 구원의 대상조차 외면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시인은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공장 안에 날아든 민들레꽃이 기계 속으로 말려들어가 부서지는 모습은 자신의 모습이자 동료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솜털에 싸인 씨앗이 으깨진 꽃들의 자리를 찾아가 “게릴라처럼 눈송이처럼 내려앉”(①:「민들레」)기를 바란다. 그래서 “비굴한 노동 속에 젊음을 모두 잃었지만 / 이젠 인부들의 피맺힌 합창소리를 들을 줄 알고 / 뜨거운 생명의 소리를 들을 줄 안”(①:「인부들의 합창」)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굳게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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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믿는다는 것만큼 불안한 것은 없다. 믿는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것으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꿔 주기도 하지만, 가능하다고 바라보는 대상에게 평생을 종속하게 만드는 어두운 측면도 분명히 존재한다. 희망을 꿈꾼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불가능한 것이 있기 때문에 꾸는 것이다. 역설적인 맥락에서 희망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부재된 현실에서 가능성을 찾지 않으면 버틸 수 없기 때문에 희망이라는 판타지를 만드는 것이다. 현실이 온전하다면 꿈을 꿀 이유는 없다.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걱정 마세요 / 제가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 조금도 걱정 마세요 /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제가 왜 저버리겠어요 / 저는 지금 규찰을 서고 있어요 / 저희들은 지금 결전을 준비하고 있어요”(②:「이것은 불효가 아닙니다」)라는 말처럼 그는 싸울 수밖에 없는 입장에 서 있다. 젊은 날의 싸움은 이처럼 지독했던 것이다. 그때의 기억이 너무나 강렬했는지 모른다. 그 시절을 시인은 “폭발 직전의 흉기를 지니고 살았던 감정 기억뿐”(③:「인간의 시간」)이라고 상기하고 있다. 흉기를 지닌 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살았던 시절이 그의 젊은 날의 전부였던 것이다. 지워지지 않는 나날이 여전히 상처와 흔적이 되어 자신의 몸속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은 애도를 충분히 하지 못하거나 위로받지 못한 채 버려진 감정으로 짓눌린 피와 같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는다. 

 

   홍수에 불어난 강을 힘겹게 건너서는 / 뒤돌아보고 가슴 쓸어내린다 / 벌건 흙물 거친 물살 저리 긴 강을 // 내게도 지나온 세월 있어 / 지나오긴 했는지 몰라도 / 뒤돌아보이는 게 없는 건 / 아직도 쓸려가고 있는 것인가 / 내가 언제나 확인하고 확신하는 이 몸짓은 / 떠내려가면서 허우적이는 발버둥인가 // 내게는 도무지 사는 일이 왜 / 건너는 것일까 // 한 시대를 잘못 꿈꾼 자의 강박일까 / 삶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일까 / 이 생의 건너에는 무슨 땅이 나올까(⑤:「강박」) 

 

   자신의 몸짓을 여전히 허우적거리거나 발버둥 치는 그 무엇으로 상정하고 있다. 한 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위치를 증명하기 위해 꿈을 꾼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적고 있지만, 꿈을 꾼 것을 부정하기보다는 지난 시절에 꾸었던 꿈이 현실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삶은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라는 질문에 매달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강박의 작용이 평생 그를 옥죄는 것은 아니다. 시집 곳곳에서는 지나가는 보살이 올해에는 넥타이 맬 좋은 일이 있을 테니 넥타이를 선물해 준다는 말에 “나도 이제 얌전하게 넥타이 한번 매고 싶다/ 코뚜레처럼 꿰기만 하면 중도주의자나 / 고격 이념주의자가 될 것 같아 /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것/ 나도 올해엔 반들반들 구두도 닦아 신고 / 경운기 짐칸에 똥 누는 폼을 잡고 앉아 / 들바람에 넥타이 잔뜩 휘날리며 / 읍내 예식장에라도 가고 싶다”(⑦:「나도 넥타이 매고」)는 시인과 만날 수 있고, 봄비가 내리는 언양장에 어린 모종들을 보며 “내 밥상을 생각해서 우리 집에 데려가는 거 아니다 / 올해는 내가 너희들 집에 가서 너희들 식구가 되려고 그런다”(⑥:「봄날에」)고 익살맞은 목소리로 세상과 대화하는 시인과 조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싸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다시 마을로 돌아가 세우리라 / 견고한 모든 것을 다 해체하고 / 다만 허망과 허공을 불멸처럼 세우리라”(⑥:「무불사」)라는 다짐을 포기할 수 없다. 시인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휴식과 여유는 있을 수 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싸워야 할 대상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그 대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여전히 세상은 부정부패로 썩어가고 있고, 뚜렷한 적을 찾기에 우리는 서로 고통스럽게 감염되고 오염되어 있다. 그렇다면 적은 누구인가? 대체 어떤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인가?






   -계속-


작성일 : 2017.12.26
저자 소개  

문종필
문학평론가. 웹진 <문화 다> 책임 편집동인. 1980년생. 문학평론가. 2017년 <시작> 문학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ansanssun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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