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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혁의 아방가르드 주점] 폐허에서 불의 사랑으로

- 백무산의 「패닉」 읽기

                                                              이성혁(문학평론가)


어쩌다 한밤중 산길에서
올려다본 밤하늘
만져질 듯한 별들이 패닉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우주

그 풍경이 내게 스며들자
나는 드러난다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죽음이 갯벌처럼 어둡게 스며들고
사랑이 불같이 스며들고
모든 질서를 뒤엎고 재앙의 붉은 피가 스며들 때
나는 패닉에 열광한다

내게 고귀함이나 아름다움이나
사랑이 충만해서가 아니다
내 안에 그런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런 따위로 길이 든 적도 없다

다만 가쁜 숨을 쉬기 위해서
갈라터진 목을 축이기 위해서
존재의 소멸이 두려워 손톱에 피가 나도록
매달린 적은 있다
고귀함이나 사랑 따위를 발명한 적은 있다

패닉만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
                                  - 백무산, 「패닉」 전문, 『폐허를 인양하다』.


  이 시 백무산의 「패닉」은 다시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시는 2015년 8월 <창비>에서 출간된 그의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에 실려 있다. 시집이 출간한 이후 얼마 안 되어 이 시집에 대해 글을 쓴 일이 있는데, 그때 이 시에 대해서도 논한 바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좀 다른 마음으로 이 시를 읽고 있으며 새로운 자극을 얻고 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폐허’라든지 ‘패닉’이라는 시어를 보고 ‘세월호 참사’가 즉각 떠올랐다. 아마 당시 이 시를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세월호를 생각했을 것이다. 2015년 8월이면 참사가 발생하지 1년이 막 지났을 때였기 때문에 이 시를 읽으며 세월호 참사를 떠올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에도 많은 이들이 ‘세월호’가 가져온 ‘패닉’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럴 때 백무산은 위의 시에서 ‘패닉’에 대한 시적인 상징화를 통해, 세월호 이후 살아갈 우리 삶의 윤리-정치적인 의미의-를 이끌어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써진 많은 시 중에서 이 시처럼 그 사건이 가진 의미와 전망을 깊고 힘 있게, 응축적으로 보여준 시는 많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가 이미 세월호처럼 바다 속으로 침몰하여 폐허와 같은 사회였음을, 304명의 희생자를 통해 비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래서 참사 이후 어떤 시인은 세월호를 한국 자체와 등치하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스펙터클의 일상 속에서 한국사회의 지반이 폐허가 되어버렸음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하지만 우리는 세월호의 304명 희생자들, 특히 고등학생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희생자들을 통해 한국 사회의 실재(The real)가 폐허임을 고통스럽게 마주해야 했다. 이제 우리가 폐허에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 앞에 갑자기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대답을 절실히 찾지 않을 때,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잊고 폐허의 실재를 다시 스펙터클과 이데올로기를 통해 가려버리고 살아갈 터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2015년만 하더라도 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무산은 한국 사회가 폐허라는 것을, 나아가 우리 자신이 폐허라는 것을 위의 시를 통해 다시금 증언하고자 했던 것 같다. 증언은 어떤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타인에게 그 사건에 대해 말해주고 폭로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한국 사회가 폐허임을 증언할 수 있겠는가? 한국 사회의 실재를 폭로하는 그 증언은, 목격을 통해 알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닐 테다. 그렇다면 목격할 수도 없는 그 실재를, 백무산 시인이 어떻게 증언자의 자격을 얻어 증언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가 보기에 그는 “내가 폐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증언자의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뭇 시인들이 목격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건의 증언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시인이란 세계와 미메시스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한 고통에 미메시스함으로써,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않은 그 사건의 실재를 증언할 수 있다. 백무산 시인이 “내가 폐허라는 사실”을 세계가 폐허라는 실재에 미메시스함으로써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 사실을 고백하는 일은 결국 세계의 폐허를 증언하는 일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가 긴장의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폐허라는 사실”의 발견과 그 고백을 통과하여 이 세계의 실상에 대한 증언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이 발견의 고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위의 시는 권력에 의한 거짓과 위선으로 두터워진 세계의 얼음을 깨뜨리며 세계 속으로 나아가는 동시에 내적 긴장의 힘을 가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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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증언 행위란 증언하고자 하는 사실이나 사건을 가감 없이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가 폐허가 되었으며 세월호처럼 침몰하고 있다는 실재를 증언하는 일은, 그 폐허의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어야 한다. 바다 속에 침몰한 폐허를 어떻게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가? 그것은 침몰되어 있는 폐허를 물 밖으로 인양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하다. 이에 따른다면, 위의 시의 마지막 행인 “나는 그 폐허를 원형대로 건져내야만 한다”는 진술은 바로 이 세상이 폐허라는 실재의 진실을 증언하고자 하는 백무산 시인의 의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 시가 실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 속의 또 다른 시인 「인양」의 마지막 연에서도, 시인은 폐허를 인양해야 할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엇을 인양하려는가 누구는 그걸 진실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걸 희망이라고 말하지만 진실을 건져올리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고 희망이 세상을 건져올린 적은 한번도 없다 그것은 희망으로 은폐된 폐허다 인양해야 할 것은 폐허다 인간의 폐허다


  진실을 그대로 인양하여 드러낼 기술은 아직 없다. 진실 그 자체는 그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시에 따르면, ‘희망’을 찾는 일도 부질없다. “희망이 세상을 건져올린 적은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희망은 도리어 세상이 폐허라는 실재를 은폐한다. 희망은 실재를 투시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그것은 실천적으로도 문제를 가져온다. 시인은 희망과는 달리 우리가 폐허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물 속의 폐허를 물 밖으로 인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폐허는 세상이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더 깊은 폐허, “인간의 폐허”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의 바탕까지 폐허가 되어버린 실재의 모습, 그 실재를 인양하여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패닉」의 서두에서 자기 자신이 폐허라는 ‘사실’을 먼저 드러내고 있는 것일 테다. 세계에 미메시스하는 시인이 자신에 내재한 폐허를 인양하여 보여줄 때, 폐허로서의 세상, 나아가 “인간의 폐허”까지도 보여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화자 자신이 폐허임이 드러나는 계기는 시 제목이기도 한 ‘패닉’에 의해서다. ‘패닉(panic)’ 은 위의 시 1연에서부터 마지막 연까지 반복되어 등장한다. 이 패닉이라는 말은 원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다.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의 해설을 쓴 조정환는 이 ‘패닉’이라는 단어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패닉’은 공포(심리학적인 의미), 공황(경제학적 의미), 그리고 심리적 공황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 그 상태란 큰 충격을 받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가리킨다. 역사학에서 pan은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패닉’의 어원은, 하반신은 염소 모양에 머리에는 뿔이 난 신인 ‘판’에서 비롯된 것인데, 흉한 외모로 버림받아 갈대 피리를 구슬프게 불며 살았다고 한다. 이 판은 광기의 신인 디오니소스의 시종이기도 하다. 이에 비추어볼 때 판은 광기의 하위 개념(일종)으로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백무산 시인은 이러한 다양한 의미를 함유하는 ‘패닉’이란 어휘를 말의 성좌-시-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그 말이 복합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시를 천천히 읽어보자. 우리는 시의 서두를 읽으면서 서정적인 공간으로 들어선다. 화자는 산길에서 어쩌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의 별들이 낮게 내려와 반짝이고 있다. 손을 올리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마치 별들이 하얗게 쏟아지는 것만 같다. 시인과 시인을 둘러싼 하늘의 별들은 광대한 우주가 응축되어 있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때 시인은 이러한 서정적 풍경을 낯설게 만드는 ‘패닉’이라는 단어를 시에 투입한다. 저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별들, 그리고 지상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듯한 별들의 모습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패닉’에 비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느닷없는 비유는 우리를 패닉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의 잠재적 영역 속으로 데려간다. 다시 말하면, 이 비유는 위에서 소개한 ‘패닉’의 모든 잠재적인 의미를 활성화한다. 별들이 쏟아지는 우주, 그것이 패닉과 같다고 한다면 그것은 저 광활하고 눈부신 우주가 공포를 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또는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판의 광기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그러나 시를 읽으면서 다양화되는 의미를 하나의 의미로 축소할 필요는 없다. 패닉의 잠재적인 의미들이 다양하게 활동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시인의 의도에도 걸맞을 것이다.)
  
   2연은 ‘패닉’의 의미를 더욱 복합적으로 만든다. 별들이 쏟아지는 풍경, 저 눈부신 우주의 패닉이 ‘나’에게 스며든다. 그러자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폐허로서의 ‘나’의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들이 나의 어둠을 비추어내면서 ‘나’의 어둠에 감추어져 있던 폐허를 가시화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패닉 같은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내가 폐허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니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패닉 상태가 됨으로써 ‘내’가 비참한 폐허라는 실재가 드러난다. 저 하얗게 쏟아지는 우주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만 폐허는 인양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자신이 폐허임이 드러나면서 그 아름다운 별빛의 패닉은 ‘내’ 속으로 “죽음이 갯벌처럼 어둡게 스며”드는 패닉으로 변환된다. 어떻게 이런 역전이 가능한가? 저 넋을 빼놓을 정도로, 우리를 패닉에 빠뜨릴 정도로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빛이 ‘나’에게 내재해 있던 폐허와 섞이면서, 그 폐허에 녹아들어 있는 죽음을 더욱 짙고 아프게 드러냈기 때문 아닐까.
  
   어쨌든 이렇듯 하얀 별빛의 패닉은 어두운 죽음의 패닉으로 전도되면서 ‘나’를 폐허로 드러내는 결과를 낳았던 것, 바로 그 죽음이 스며든 존재야말로 바로 폐허인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 스며드는 폐허는 또 다른 강렬한 정동이 ‘내’ 속으로 스며들도록 이끈다. 그것은 사랑이다. 스며드는 죽음에 의해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절박한 사랑의 요구 때문에 시인은 죽음이 스며든다는 말을 한 직후에 “사랑이 불같이 스며”든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어쩌면 죽음이 삶에 스며들고 있는 상황에 대항하여 탑에 올라간 노동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도 존재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 고귀해지고 사랑해야 했을 것이다. 그 불같은 사랑 역시 패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에 따르면, 그는 “가쁜 숨을 쉬기 위하여/갈라터진 목을 축이기 위해서” “존재의 소멸이 두려워 손톱에 피가 나도록/매달”리면서 사랑을 발명해야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명한 사랑, 그것은 “고귀함이나 사랑이 충만해서” 발현되는 것과는 유가 다르다. 그러한 고귀함이나 사랑 “따위로 길이 든 적이 없”기 때문에, 발명해야 했던 그 사랑은 죽음과 맞닿아 있기 때문에, 시인의 사랑은 전복의 힘으로 전화될 수 있다. 그 사랑은 “모든 질서를 뒤엎고 재앙의 붉은 피가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시인이 말하는 재앙은 “모든 질서를 뒤엎”는 전복이다. 그것은 죽음이 스며드는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 전복이다. 그런데 그 전복 역시 붉은 피를 흘리는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그 재앙은 사랑을 통한 죽음이다. 그 재앙의 붉은 피에는 불같이 뜨거운 사랑이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전복과 재앙의 붉은 피로 전화되어 나타나는 “패닉에 열광”한다. ‘나’에게 재앙의 붉은 피로 전환된 패닉이 스며들면서 ‘나’는 열광이라는 패닉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듯 죽음이 스며드는 패닉 상태가 시인으로 하여금 사랑을 발명하도록 추동했으며, 나아가 시인은 사랑의 힘에 의한 전복과 재앙의 붉은 피가 끓는 상태에 열광-패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패닉’만이 도리어 “닿을 수 없는 낙원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이 폐허가 되어버렸음을 드러낸 패닉은, 시인을 폐허로 소멸되어버리지 않기 위해 사랑을 발명하도록 이끌었다. 사랑을 발명해야 할 만큼 간절한 삶, 그러한 삶만이 불온한 전복, 이 세상을 완전히 뒤엎는 재앙의 패닉-붉은 피-에 열광하며 낙원을 꿈꿀 수 있다. 그러한 낙원에 닿을 수는 없을지라도, 열광의 패닉 속에서 그 낙원의 현실화 가능성을 꿈꿔볼 수 있는 것이다. 


   백무산 시인은 위의 시를 통해 패닉의 잠재적인 의미를 활성화하면서 패닉이란 말에 ‘시적인 힘’을 충전시켜 세월호 참사 이후 사람들이 빠져들었던 ‘패닉’ 상태를 새로운 삶의 힘으로 전화시키고자 했다. 위의 시의 ‘나’를 ‘우리’로 확대해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패닉-세월호가 불러일으킨 패닉, 그것은 별처럼 빛나는 아이들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패닉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은 우리가 폐허임을 드러냈지만, 그래서 우리의 삶에 죽음이 스며들도록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간절하게 사랑을 발명하도록 이끌었다고.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질서를 전복하고 다른 질서를 욕망하게 만들었다고. 그렇기에 희망보다는 침몰되어버려 폐허가 된 우리의 실재, 그 모습을 원형대로 인양하여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볼 용기가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더욱 필요하다고. 그 용기야말로 세월호 이후의 삶의 윤리이자 정치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위의 시를 처음 읽은 지, 2년이 넘게 지났다. 그 기간 동안 알다시피 많은 일이 일어났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방치한 정부는 다중이 들고 일어난 촛불의 힘으로 권좌에서 내려왔다. 뇌물죄 등의 혐의로 전 대통령은 감옥에 들어갔고 촛불을 든 이들의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 나아가 우리 자신이 폐허임을 드러낸 세월호 참사의 패닉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아니 백무산 시인에 따르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 패닉은 우리가 폐허임을 계속 가시화한다. 세상이 달라졌다면서 이 가시화되는 폐허를 애써 우리가 외면한다면, 세월호 참사는 또 다시 반복될 수 있다. 그래서 백무산 시인의 생각에 따라 우리의 폐허를 원형대로 계속 인양해야 한다고 여전히 말할 수 있다. 참사가 가져온 죽음의 패닉이 보여준 우리 자신의 폐허를 삶의 바닥으로부터 인양하여 드러내고, 그렇게 가시화된 폐허를 우리가 용감하게 직시할 때, 우리는 불같이 절실한 사랑을 발명하기 시작할 것이며 그리하여 사랑이 우리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것이다.


   「패닉」은 우리가 그 불같은 사랑을 통해 죽음의 질서를 전복하고 우리의 폐허로부터 다른 세상, 다른 삶을 건설해나감을 통해, 비록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낙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광적 욕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전해준다. 이러한 열광, 그 패닉이, 스펙터클의 밑바닥으로 계속 침몰하면서 폐허가 되고 있는 사회, 그리고 우리 자신을 인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2017년 가을호에 실린 「폐허에서 불의 사랑으로」를 수정한 글입니다.



작성일 : 2017.12.11
저자 소개  

이성혁
1967년 서울 출생. 문학평론가. 《문화 다》 편집주간.
1999년 《문학과창작》 평론부문 신인상 수상. 2003년 《대한매일신문》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미래의 시를 향하여』 등. redland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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