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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진희의 문학 공감] 천양희,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올라갈 길 없고/내려갈 길도 없는 들에서(, 「중에서)

 

엄진희(문학평론가, 시인)


   최근 평소에 존경하던 선생님의 투병 소식을 들었다. 잠시 우두커니 있다가 우두커니가 되어 버렸다. 마음이 좋지 않다. 이럴 땐 다른 방법이 없다. 시라도 꺼내 읽을 수 밖에. 
 
   지금의 상황을 말할 마땅한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시적 언어’라고 할 만한 것 말고는. 나를 둘러싸고 모든 것은 갑자기, 우연적으로, 불시에, 예정 없이 일어난다.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게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별 앞에서, 사랑 앞에서, 생로병사 앞에서 항상 이런 처지에 있는지 모른다.


   일상을 사는 사람은 일상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진다. 하지만 평소에 시를 읽고 시로 호흡한 사람들이라면 일상이 흔들릴 때 ‘시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이 시인이고 시의 독자들일 것이다. 시의 세계는 그 자체가 항상 비상사태이고 혼돈이니까 말이다.


   한 권의 시집에서, 어쩌면 가장 개별적일, 하지만 동시에 가장 보편적인 일이 일어난다. 시와 시의 독자가 만나 동감하고 교감하게 되는 것이다. 말한 것처럼 시는 자체가 혼돈이고 혼수상태다. 그런데 그곳에서 교감이 일어난다니 이상한가. 천양희는 사랑이란 함께 웃는 것이 아니라 한쪽이 우스워지는 것(시, ‘방편’ 중)이라고 말한다. 왜 시인은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보다 시인처럼 말하는 게 더 정직한 것 아닐까. 게다가 공감이 간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정직한 진실에 직면하길 꺼려한다. 소용은 없다. 시는 더 정직해 지니까. 시는 가장 난처한 언어로 진실을 말해버린다. 살아도 살아도 평행선을 달리는 것 같은 때가 있다. 시인은 기차를 기다리다 철로를 보며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냐고 묻는다. 철길은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그 위를 달리는 기차는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시, ‘기차를 기다리며’ 중에서). 삶은 평행선이다. 만나지 않는다. 머물지도 않는다. 이게 삶이라면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 아닐까. 하지만 시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게 의미이고 가치라고. 고민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정처없는 삶을 어떻게 삶이라 할 수 있을까. 항상 길 떠나야 하는 기차처럼 우리는 삶에 안주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 모든 게 의미 없는 건 아니다. 나를 지나가는 모든 것은 한번도 내 것인 적 없고 삶은 가도 가도 기차를 기다리는 일처럼 기다림일 뿐이라는 걸 천양희는 시인한다. 누군가에게는 시인하기 어려운 진술일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바로 이런 어려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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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도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시, 「기차를 기다리며」 부분


   우리는 어려운 건 싫어한다. 하지만 시는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혼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시인에게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오는 것(시, ‘참 좋은 말’ 중)이다. 기억은 이렇게 단순히 과거의 잔상인 것만이 아니라 완전히 현재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그린비, 2013). 이렇게 기억은 현재적일 수 있고 ‘여기’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또 마찬가지로 그것은 ‘미래’를 향해서도 열려 있다. 시인에게 ‘옛날’은 어쩌면 우리가 가야할 곳, 우리가 잃어버렸기에 되찾아야 할, 도래해야할 시간이고 시인은 그걸 찾아 떠날 수 밖에 없다. 시에서의 기억은 그러니까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그리고 미래와도 동시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셈이다.


   일방향적인 전진하는 진보적 시간(과거, 현재, 미래)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시간인가. 그 안에는 아무런 인간적인 것도, 아무런 느낄 것도 없다. 그래서 벤야민은 이런 직선적인 시간관이 공허하고 텅빈 시간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시는 시간에게도 혼동을 주고 우리의 정상적 문법도 교란하며 상식도 해체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런 시를 읽으며 공감하고 어떤 때에는 무릎을 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좋은 시란 가장 일상적이지 않은 언어로 그러니까 ‘시적 언어’로 우리의 공감을 사고 보편성을 획득하는 시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혼돈에서 더욱 공감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상징계는 잘 짜여져 있는 것 같지만, 종종 예상 밖의 일들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도 일어나면서 우리의 일상을 흐트러뜨린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는 말을 찾지 못하고 허둥지둥 하게 되는데 시가 그 순간의 말을 대신 한다. 그런데 그 말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치유의 말도 아니다. 어쩌면 더 지독하게 우리 삶이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런 시의 언어가 다른 사람과 나를 연결해주고 그 연대 속에서 나와 유사한 다른 인간(타자)에 대해 공감하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금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 꿀 수 있게 한다. 폐허를 경험한 사람들이 연결된다는 것은 폐허에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 불가능에서 오는 가능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건 ‘벽에 문을 내기’와도 같은 것이다. 
 
   시인은 벽에 문을 내자 하고 문에서 벽을 찾는다(시 ‘벽과 문’ 중에서). 뚱딴지 같은 사람들이 시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왕래를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우리는 힘들 때가 있고 또 막힌 벽인 것 같은 어떤 일도 다른 방식으로 한번만 생각하면 해결되기도 한다. 벽이 왜 벽이기만 할 것인가, 힘들 땐 기대 쉴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아닌가. 또 벽만 어디 벽일까. 결벽도 벽이고 절망도 벽이 아니던가. 시인은 벽에서 다른 것을 보고 밑도끝도 없는 절망에서 절망이 아닌 다른 것을 길어 올린다. 이게 천양희 시의 힘 아닐까. 절망하는 밤은 새벽을 들어올리고 그 새벽 하늘은 다시 하나의 보이지 않는 문이 된다. 저 공허를 문이라 부를 것인가, 벽이라 부를 것인가. 열린 것 같지만 닫힌 문일 수도 있는 문.


   그 문에는 문지기가 하나 있다. 문지기는 그 문은 나만을 위한 문이라고 말한다. 시는 언제나 늘 우리 주변에 열려 있지만 시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어떤 문지기도 막아서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그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지 말지를 결정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다.


벽만이 벽이 아니라
때론 결벽도 벽이 되고
(....)
벽에다 등을 대고 물그러미 구름을 보다보면
벽처럼 든든한 빽도 없고
(....)
벽엔들 문을 못 열까
문엔들 벽이 없을까             시, 「벽과 문」 부분

  

 

작성일 : 2017.09.12
저자 소개  

엄진희
문학평론가, 시인. 웹진 <문화 다> 편집동인.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수료하고 현재 연구 중에 있다. 2017 <문학의 봄> 시부문 신인상, 2017 <한국문학예술> 문학평론 부문 신인상 수상. kafka2021@gmail.com
[댓글]
 
이은영  [2017-09-12 12:50]
진희샘~ 글 넘나 좋아요. 술술 읽히면서
시에 대한 샘의 정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양희 시인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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