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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규의 A와 정치] 신비와 아이러니


주원규(소설가, 철학박사)


  먼저, 정치를 신비로 보는 전제부터 살펴보자. 신비란 단어, 혹은 그 말뜻의 쓰임새는 대체로 종교적인 욕구, 혹은 충동에 헌신되어 있는 편이다. 종교는 대개 현실적인 실존의 사건을 비밀의 영역에 정박해 두고 실존 너머나 그 배후에 있는 이면의 충동, 보이지 않는 그 어떤 것에 매달리는 편이므로 쉽사리 규정되지 않는 그 어떤 것을 추종하는 과정에서 발견됨 직한 일련의 가치현상을 ‘신비’, 혹은 ‘신비롭다.’로 정의내리기에 썩 용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그 궁극의 엄밀성과 마주할 때, 태생적으로 현상세계로부터 발을 빼는 고질 습성을 갖고 있다. 궁극엔 아무 것도 없음을 쑥스럽게 고백하는 게 종교일진대, 문제는 그렇게 궁극의 세계까지 그런대로 뭐 하나 주워 먹을 게 있을 줄 알고 총총히 쫓아간 가치현상의 추종세력에 있다. 이 추종세력은 종교가 막다른 곳에 다다랐을 때, 수줍게 고백한 그 ‘아무 것도 없음’을 한사코 부정한다. 이걸 제법 고상하게 명명하면 ‘부정의 부정’인데, ‘부정의 부정’에 직면한 추종세력과 그 추종세력의 영향력 아래 포박되어 버린 실존은 ‘부정의 부정’에서 전자의 ‘부정’을 소거함으로써 ‘부정’만이 잔류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락하고 그 잔류물을 애써 무시하는 방법을 동시에 도모함으로 인해 신비의 여흥을 여전히 남아 있는 정치의 영역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전가는 신비의 한 단면이거나 아님, 전체로 군림할 수 있는 강력한 진화동기를 품고 있는 셈인데, 여기에 필사적으로 편승하는 정치, 정치욕은 짐짓 고상한 척 하거나 형이상학 척하는 종교와 다른 포잡한 의미 섭생의 끝판왕이기에 신비의 진화가 어떤 국면으로 전개될는지 예측불허하다는 데 전율과 공포가 따라붙는다.


   이 공포를 다른 말을 표현해야 한다면 필자는 단연코 아이러니로 명명하고 싶다. 정치욕은 실존의 하향성을 창피하다든지 어렵다는 말을 앞세워 물러서게 하는데 있어 한 줌도 동의하지 않는다. 실존이 인간 오욕의 밑바닥을 보게 하는 하방 운동을 지속을 조절하지 않을 경우 나타나는 현상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비극의 대물림, 혹은 비극의 뒤엉킴으로 연결될 수 있다. 실존의 안팎으로 스며드는 정치는 실존의 구조태를 내부세계에서의 무순차성에 근거한 없음의 공전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는 실존을 외부세계에서 손쉽게 받아들이는 타자전용의 세련된 올가미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그 밀어 넣음의 구렁을 실존의 살아가는, 살아내는 당위로 설정한다. 이후 실존의 구조태는 실존을 실존으로 명명하기 위해 헤어 나오는 게 불가능한 올가미의 얽힘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인데, 그 수용 과정에서 실존은 단독자적인 실존, 그 자체로 강화되는 게 아니라 수많은 복수화된 실존들의 뒤엉킴, 떡진 머리처럼 엉겨 붙은 상호교란적 실존으로 돌출되는 것이다. 이 상호교란이 어떤 나름의 통일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바로 정치욕이고 정치욕의 동기부여를 지속 가능케 하는 동력이 바로 종교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던 바로 그 빌어먹을 ‘신비’라는 놈의 정체다.


   이 대목에서 좀 더 세밀한 구분이 필요해 보인다.


   말장난 같아 보이지만 ‘정치’와 ‘정치욕’은 다르다. 정치는 사실 그 원류의 흐름에서 조망해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 곧 ‘부정 대명사’다. 이 부정 대명사의 작동은 지극히 무질서해 보이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이른바 광장 정서의 무책임한 지속을 무리 없이 동원하는 것처럼 순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쉽게 말해 그 규모나 인원이 얼마나 거대하든, 얼마나 복잡하든 상관없이 그럭저럭 굴러간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런 것이다. 지도자가 있건 말건, 법이 있건 말건, 체계가 있건 말건, 심지어 양심이 있건 말건 시간의 직하를 견뎌 가며 그저 존재할 수 있음이다.


   하지만 정치욕은 정치의 이런 식의 무위(無爲)적 태도를 불순하거나 게으른 것으로 매도한다. 무의미하고 무책임하다는 분개를 억제하지 않는다. 정치욕은 정치가 가진 본래의 무구성 앞에서 소름이 돋는다는 식의 용트림을 토해낸다. 그러면서 집요하게 정치의 근원에 뭔가 대단한 가치, 이념, 목표가 있다는 식으로 선동한다. 실존은 그저 실존이고, 정치도 그저 정치인데, 그 행간에 어떤 의미를 명명하거나 부여하고 마치 그 의미가 없으면 저능하고 게으른, 금수보다 못한 오합지졸로 매도한다.


   이런 식의 정치욕으로 태동되는 가치, 아니 정치욕으로 인해 소환되는 가치현상에 신비가 있다. 이 신비를 정치욕은 종교라는 영역에서 아무 대책 없이 갖고 와서는 정작 종교가 쑥스럽게 그 궁극엔 아무 것도 없다고 수줍게 밝힌 고백을 똑똑히 들어 놓고서도 침묵하는 뻔뻔함으로 일관한다. 그와 함께 실존을 ‘실존들’로 확장시켜 놓고 이를 제 멋대로 뒤섞어버린 다음 실존의 고유성을 가학적으로 짓밟는 방식으로 꾸역꾸역 실존의 순간순간을 스스로 집어 삼키고 있는 것이다.


   이 순간들이 짓밟혀지는 태도의 지속이 바로 아이러니의 극치다. 그렇다면 이 아이러니의 태동의 근본엔 정치와 종교, 그 행간을 지배해버린 정치 慾, 종교 慾. 그 慾들의 가치현상의 총체인 A가 자리 잡는다.


   A란 무엇인가.


   이쯤해서 뭔가 대단한 걸 밝히는 척 그만하고 A에 대해 최소한의 정의라도 내려 보자.


   ‘도대체 A는 무엇인가.’


   A의 규모와 크기, 아님 의미에 대해 한 번 살펴보는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한 것이 바로 지금이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필자는 다시 말의 주춤거림 속에서 혼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획, 낱말, 조사, 그들의 연결, 그 연결을 마무리하는 하나의 문장. 이러한 정의로 인해 규정되는 것은 A를 실존의 각성 범주 안에서 스스로 탈주시켜서 더 크고 견고한 기형의 괴물로 진화시키는 촉매행위가 될 것이기에 A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멈칫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위의 질문에 답해보기로 하자.


   ‘도대체 A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A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도 또한 아니다.


   A는 늘 그렇다. 늘 이런 식이다.


   늘 이런 식이라 함은 A는 그 무엇이든, 그 무엇이 아니든, 규정을 하든, 규정하지 않든, 늘 규정을 내리든지, 그렇지 않든지 하는 방식으로 욕(慾)의 추동(推動)을 이끌어오고 지속해 왔던 것이다.


   A가 욕동을 일으키는 방식은 그러므로 늘, 강력한 모호함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존재와 존재, 관계와 관계 사이에 보이는 틈, 그 틈을 A는 어떤 신비의 여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틈이 보이는 순간부터 그 ‘틈’을 ‘틈’ 아닌 가득하고 충만하게 채워내야 할 어떤 성스런 의무감 같은 것으로 돌변해 버리는 자동변화기 같은 역할을 자임한다. 그리고, 그 자동변화의 흐름과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인데, 그 압도적 속도 너머의 속도에 어느새 취해버리거나 세뇌당한 우리는 그것이 A로 인해 윤색된 정치, 종교란 사실을 자연스럽게 망각하는 것이다.


   망각, 혹은 망실된 현실 순간의 지속을 통해 우리는 어떤 틈새를 실감하기는 하는데, 그것을 명명하거나 그것에 의지해 곳곳에서 옹립해 세우고자 하는 유명성의 특질이 A에 의해 규명되어야 한다고 믿는 일종의 맹신을 갖게 된다. 정치의 본연이 무의미와 혼란이란, 혹은 무의미, 혼란이란 기표를 마냥 부정적인 것으로 퇴락시킨 일련의 의미착란 그 자체임을 인정할 수 없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의 틈 자체를 파고든 신비는 신비 그 자체의 숙명적인 돌출로 존립되어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한 모호한 좌절의 반복을 오히려 신비의 목표로 설정하는 이 이중 아이러니 앞에서 존재, 존재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침몰하기 시작한다. 아니, 이미 그 전방위적 침몰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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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1968년작) 이다. 팝아트는 현실의 리얼리티를 리얼리티의 충실한 재연행위를 통해 폭로, 또는 야유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그 이면의 지류를 잠식한 리얼리티의 배경에 대해선 지독히도 침묵이다. 행복한 눈물이 그 침묵에 대한 암물한 묵비권으로만 보이는 건 필자의 작위적 해석만은 아닐 것이다.  
 


A를 읽으며 정치를 다시 읽는다.


   A에 대해 정의내리기를 실패한 이 순간, 필자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 내려간 독자는 다시 한 번 격정적 환희와 절대적 절망의 간극 앞에 멈춰 설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 멈춰 선 위치, 그 현전(現前)이나 현후(現後)의 낭떠러지를 발견할 것이다. 끝을 모르고 파고드는 듯, 거대한 심연의 손을 펼치는 습하고 어두운 구렁의 실체 목도에 대해 애써 외면하는 시선으로 일관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에워싼 정치를 다시 읽어야 할 재독법의 순간과 지금 이 순간마저도 마주하고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가 우리의 정치, 그 자체라면 그 정치를 지금까지, 앞으로도 추동할 법한, 혹은 그런 것처럼 ‘체’하는 정치욕의 욕의 근원에 도사린 A를 의연히 배제하고 정치를 읽을 수 있는, 아니 읽어야 하는 새로운 독서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 외침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하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지만 영원한 현재인 지금, A를 배제하거나 최소한 A와 순간순간을 맞닿아 있으면서도 A와의 대면을 심드렁하게 대하는 것, 창세 이후, 그야말로 최초로 그처럼 황홀하고 그처럼 마땅해 보이던 A를 무섭게 병든 애인처럼 짜증스럽게 바라보는 법, 그 법이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를 다시 읽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작성일 : 2018.04.06
저자 소개  

주원규
1975년생. 소설가. 철학박사. 편집동인
제14회 한겨레문학상 수상, 제2회 간향건축문학상 (건축평론), 제2회 광주일보문학상(소설) 수상. 장편소설 『무력소년생존기』, 『너머의 세상』, 『망루』, 청소년소설 『아지트』, 『주유천하 탐정기』, 동화 『깜수네 집에 놀러 갈래?』, 에세이 『황홀하거나 불량하거나』,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 평론집 『성역과 바벨』 출간. 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졸업 (철학박사) bay313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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