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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윤의 연극 리뷰] 버바텀 음악극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 류미 연출의 음악극 <수원 사는 사람 : 유명선>(2017)


                                                                 한상윤(대중문화 연구자)


  작 · 연출 류  미
  작  곡 박소연
  드라마트루그  정명문
  주  최 창작집단 VOICE2(V2)  
  일  시        문래예술공장 박스 씨어터 2017.9.19. ~ 24.
  출연진 최지훈, 한세라, 안경희, 김 명


  <수원 사는 사람 : 유명선>은 연출가 본인의 외할머니의 삶을 버바텀(Verbatim) 음악극 으로 풀어낸 실험적 연극이다. ‘증언의 연극’이라 불리기도 하는 버바텀 연극은 말의 힘을 믿고 인터뷰, 증언, 일기, 편지 등과 같은 구술/기록 자료들을 편집하여 구성하는 형식인데, 이 작품은 여기에 음악이 더해져서 구성되었다. 할머니의 과거를 인위적으로 재현하는 대신 가급적 있는 그대로의 말과 음악으로 무대를 채우는 이 작품은 자칫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는 평범한 개인의 역사를 생생한 울림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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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에 태어난 유명선 할머니는 혼란스러운 역사적 시간들을 겪어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의 할머니의 증언에는 그 고단했던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보조 교사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이 집에 들이닥치는 일도 경험하였다. 전쟁을 피해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고, 전쟁 후에는 먹고살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갖가지 궂은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특정한 역사적 사건보다 일상적 문제들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할머니의 기억은 역사를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중함에서 비껴나 있기도 하다. 피난으로 경황이 없는 중에 호야불 아래에서 선보고 결혼 했던 일, 밖으로 나다니며 술만 마시는 남편 때문에 속상했던 일, 임신 후 남편과 함께 간 중국집에서 처음으로 탕수육을 먹었던 일, 자신이 사온 호떡을 아이들에게만 주는 남편이 서운했던 일 등 할머니의 기억은 결혼과 가족, 음식의 문제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일상에 초점이 맞추어진 유명선 할머니의 기억은 개인적이고 사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이 극은 네 명의 배우가 유명선 할머니의 역을 함께 맡아 연기함으로써 할머니 개인의 경험을 보편적 의미로 확장시킨다. 한 명이 아닌 네 명의 배우가 함께 연기하는 할머니는 유명선 개인이자, 어딘가에 존재했었을 지도 모르는 익명의 ‘유명선들’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대문자 역사를 벗어난 개인의 역사는 새로운 방식으로 집단의 역사와 다시 맞물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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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에서 무엇보다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할머니의 인터뷰, 배우들의 대사, 음악이 어우러져 무대를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극의 무대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하나는 네 갈래의 길로 이루어진 중앙 공간이다. 여기는 배우들이 음악을 연주하는 공간이자 할머니의 과거가 재현되는 공간이다. ‘재현’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몇 명의 배우들이 역할을 맡아 당시의 상황을 현재 무대 위에서 연기하여 보이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극에서의 재현은 과거의 어느 순간을 인위적으로 꾸며서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의 시간을 억지로 무대 위에 소환하는 대신, 할머니 역을 맡은 배우들이 인터뷰 당시 할머니가 사용하였던 회상형 발화를 그대로 이어받아 기억을 전달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일들이 무대 위에 직접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하는 유명선 할머니(를 연기하는 배우들)’의 말을 통해 일상의 언어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네 갈래의 길로 이루어진 중앙의 무대 공간은 인터뷰 당시 유명선 할머니가 더듬어간 기억의 길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또 하나의 공간은 소파와 탁자가 놓인 무대 오른쪽 공간이다. 증언의 발화 속에서 기억의 시공간을 오가게 되는 중앙 무대와 달리 이 공간은 지금 현재의 시간이 자연스럽게 흐르는 곳이다. 여기에서 할머니는 TV를 보며 수다를 떨거나, 손녀에게 먹을 것을 잔뜩 가져다주는 등 평범하고도 편안한 일상을 지낸다. 이 장소는 극 중간에 끼어들어온다. 그러기에 과거의 삶과 현재의 일상이 병렬되며 특별한 효과가 발생한다. 일제치하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며 노동에 동원되고, 전쟁으로 피난을 다니고, 쌀이 없어서 모래를 퍼내는 일을 하고 정부에서 밀가루를 타 먹던, 지금의 젊은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과거의 시간들이 ‘임플란트를 했다’든지 ‘뉴코아에서 돈까스를 먹었다’든지 하는 현대적 일상의 시간과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있는 동시대 우리네들의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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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언급하였듯 네 명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하는 대사는 실제 할머니가 인터뷰에서 했던 말들을 그대로 가져온 증언 형식의 대사이다. 이것은 말의 자연스러움을 최대한 살린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증언의 형식을 취하다보니 서사의 전개가 분산되고, 그로인해 감정 몰입이 되지 않아 극이 지루해질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음악이 일정한 역할을 해 준다. 우선 극을 진행해가는 사이사이에 배우들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음악은 감정을 전달하고, 분위기를 전환하며 밋밋해질 수 있는 극에 생동감을 더해준다. 또한 할머니가 기억하고 부르는 노래는 지나온 삶 속에서 할머니가 느꼈을법한 여러 감정을 곡조에 실어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 한 예로, 남편이 신혼 때 가르쳐 주었다는 <푸른 물결 바다 멀리>를 들으며 관객들은 젊은 시절 할머니가 느꼈던 설렘, 원망스럽기도 했던 남편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이처럼 말로는 충분히 전달하기 어려운 개인의 내밀하고도 섬세한 감정을 음악과 노래를 통해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덧붙여, 극에서 사용되는 배경 음악은 할머니의 단편적 기억들과 특정 시대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가령 건전한 분위기의 조성을 위해 매일 새벽 라디오에서 울려 퍼졌다는 <창문을 열면>의 경우, 1960년대 자조근로 사업에 참여하고 밀가루를 받아먹었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장면에 깔림으로써 할머니의 삶이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동시에 역사적 시간과 함께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다. 배경음악의 정보를 관객들이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되겠지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강의 시대적 분위기는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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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려하지 않은 단출한 무대를 증언의 언어와 음악만으로 채워 자연스러움을 살리고자 한 이 극의 연출은 사실상 극의 마지막 장면을 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의 처음에 잠시 등장하며 시작을 알렸던 인터뷰 당시 할머니의 실제 목소리는 극이 마무리 되는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런데 이때 흘러나오는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저 소탈하게 손녀의 질문에 대답 해 주는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예상외의 커다란 울림을 가져온다. 무대 위에서 배우의 몸을 통해 전달되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무대 밖에 실존하는 현실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순간, 그 삶의 진정성이 한층 부각되며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순간 관객은 생의 치열함과 함께 교과서나 활자 속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생생한 삶으로서 역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인위적인 서사나 논리적으로 구성된 언어를 통한 설득을 포기하고 담백한 태도로 개인의 기억에 접근하였기에 획득할 수 있었던 진정성이다.


  버바텀 음악극이라는 형식은 확실히 낯선 방식이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처음에 어떤 방식으로 이 극을 받아들여야 할지 망설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극은 버바텀 음악극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도 결국에는 자연스러운 말이 주는 감동을 느낄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작품의 형식적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창작집단 V.O.I.C.E2(V2)가 어떤 방식으로 소리의 실험을 확장해 나아갈 지 기대된다.





작성일 : 2017.10.05
저자 소개  

한상윤
1986년생. 대중문화연구자.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mystictsuy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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